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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과 결혼 사이

w. 필담

@schreiben_sd

행복을 만드는 우리집

 

이케아 코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우성은 이케아 코리아를 고소하고 싶었다. 저 슬로건은 거짓말이니까. 우성의 머릿속에 이케아 홈페이지에서 본, 스프라이트 셔츠를 입은 백발의 할아버지 사진이 떠올랐다. 주름진 분홍색 얼굴에 은은하게 피어오른 미소만큼이나 은근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 할아버지는 읽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케아의 창립자였다.

그 할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코리아 슬로건 이즈 롱. 베리베리 롱. 와이? 디쥬 세이 와이라 하신다면, 우성은 친히 자신의 집에 그 할아버지를 초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다. 조립이 덜 된 서랍장을 사이에 두고 결혼을 앞둔 연인과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이 광경을.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냐고요.”

“왜 또 확대해석하는데. 그냥 집중해서 해보라고.”

“집중하란 말 일부러 쓴 거 맞잖아. 나 비꼬려고.”

“네가 괜히 아니꼽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우성이 부쩍 자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 시작은 그냥 투정이었다. “형 나 이거 못 하겠어요. 너무 어렵고 뭔 소린지도 모르겠어.” 우성은 판자며 갖은 부품이 나뒹구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투덜댔다. 발끝에 명헌이 가지런히 사이즈별로 분류해둔 나사가 채였다. 명헌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설명서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설명서를 봐. 넌 공고 나온 애가 이 쉬운 걸 왜 못 해.”

“아, 그놈의 공고, 공고.”

 

우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우성이 산왕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간 건 농구가 유명해서였지 공업고등학교여서가 아니었기에, 명헌의 공고 타령은 늘 억울한 지점이었다. 농구 잘 한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공고생이 그것도 못 하냐니. 우성에게 손재주는 농구할 때만 쓰면 그만이었다. 이딴 번거로운 서랍장을 조립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완제품을 사면 편한 걸 왜 꼭 DIY를 사냐고요.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예요.”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마음에 드는 건 직접 조립하고 싶다고. 너도 알겠다며. 도움 필요 없다니까 굳이 같이 하자고 해서 와놓고 왜 이제 와서 시비를 걸어?”

“우리 같이 살 집이니까 같이 하죠. 그리고 이렇게 시간 걸릴 줄 알았어요, 내가?”

“나 혼자 했으면 이미 끝났어. 네가 옆에서 투덜거리고 애써 정리해 놓은 거 다 헤쳐 놓으니까 늦는 거 아냐.”

 

명헌이 몸을 팩 돌리고는 다시 조립에 집중했다. 우성은 쪼그려 앉아 설명서만 읽는 명헌을 마뜩잖게 바라봤다. 삐죽 나온 입술이 무시무시한 말을 품은 채 열렸다.

 

“그러니까 나만 없으면 되는데 내가 와서 이 모양이라는 거죠?”

 

명헌이 한숨을 쉬며 설명서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2차전이었다.

 

 

말 다 했어요? 나가라면 누가 못 나갈 줄 알아요? 그래요. 다 때려치워요. 때려치우자고.

 

우성은 그길로 집을 빠져나왔다. 손에는 핸드폰, 에어팟, 그리고 지갑만이 들려있는 채였다.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신발을 신으며 돌아본 명헌은 자기를 붙잡을 생각도 않고 서랍 상판에 나사나 끼우고 있었다. 정이 떨어질 정도로 야박했다.

미국 NBA 리그에서 뛰고 있는 우성이 굳이 한국으로 들어와 결혼 준비를 하는 건 순전 명헌을 위한 일이었다. 물론 우성도 한국에 아는 사람은 있었지만 10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하며 얻은 사람에 비하면 적었고, 지금 우성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우성의 부모인 광철과 미숙도 미국으로 건너와 지내는 날이 많았으므로 지금 한국에서의 일정은 정말 명헌에 대한 우성의 배려가 확실했다. 명헌은 국내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너 그렇게 미국이 좋으면 그냥 미국 가.

 

그랬기에 명헌의 그 말은 우성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의와 배려를 철저히 무시한 발언이었다. 그래서 나왔다. 미국에 가라는데, 미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로든 떠나드려야지. 꺼져드려야지. 우성은 핸드폰으로 차편을 알아보았다. 떠나고 싶었다. 웬만하면 명헌과의 추억이 깃들지 않은 곳으로. 추억을 떠올리면 이젠 짜증이 나는 지경이 됐다.

그래서 우성은 다짜고짜 부산행 KTX를 탔다. 차를 타기 전에 남색 캡도 사서 쓰고, 그걸 쓰곤 우동도 사 먹었다.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마시며 여유도 즐겼다. 휴일이란 이런 거지. 철제 서랍장 설명서를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라. 우성은 가까스로 얻은 좌석에 큰 몸을 애써 구겨가며 생각했다. 결혼과는 상관도 없는 것들이 간절했다. 그토록 바라던 결혼이었는데도 그랬다.

두 사람의 결혼과는 상관이 없지만 부산은 어쨌든 꽤 유명한 관광도시였기에 당일에 별생각 없이 내려온 우성은 도심과는 살짝 동떨어진 곳, 다소 애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에 묵게 되었다. 그곳은 조식을 제공했지만 로비에 테이블은 달랑 두 개였고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잘 통하지 않아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야 했다. 모든 걸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배보다는 술이 고팠던 우성은 일단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여름과 바다의 끈끈하고 짭짤한 공기가 씁쓸한 인생에 간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오길 잘 했어. 우성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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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헌은 눈앞에 놓인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종이테이프로 밀봉이 된 상자 안에는 300장의 청첩장과 300장의 봉투, 300개의 실링 스티커, 300개의 디자인 플라워가 들어있었다. 세 번의 수정 작업 끝에 마침내 완성된, 프리미엄 라인의 청첩장이었다. 명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막 서랍장 조립이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우성과 명헌은 서랍장 조립을 마치고 곧장 청첩장을 접었어야 했다. 당장 내일이 첫 번째 청첩 모임이었으니까. 수정 작업을 한 번 더 하는 바람에 완성이 늦어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윈 없었다.

우성의 일정에 맞춰 그 시절 산왕공고 농구부가 귀한 시간을 냈다. 현철, 동오, 낙수, 성구. 거기에 현필까지. 명헌은 텅 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우성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모임을 미룰까. 하지만 이 모임 날짜를 정하기까지도 엄청난 논의와 배려와 양보가 있었다. 어떻게든 모임은 진행해야 했다.

명헌은 탁, 탁, 손톱으로 종이테이프의 끝단을 뗐다. 크림색 리본이 둘러진 화사하고 깨끗한 청첩장이 명헌을 반겼다. 투박한 손끝에 닿는 리본은 어린아이의 볼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명헌의 얼굴에 피곤하고 착잡한 미소가 걸렸다. 둥글게 휜 그의 등 위로 초여름의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뭐야. 여기 어디야?”

 

우성은 문득 멈춰 서서 고개를 두리번댔다. 그냥 무작정 걷다 보니 안 그래도 낯선 동네의 정말로 낯선 골목까지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우성은 귀에 꽂았던 에어팟을 빼 케이스에 넣었다. 인적이 드문, 말 그대로 로컬 주민들이 살 법한 동네였다. 스포츠에 있어서는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나 커뮤니티 사이트 인기글 점령을 심심찮게 하는 터라,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본능적으로 피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우성은 땀이 마른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목이 말랐고 배까지 고팠다. 그렇다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자니, 간다 한들 어딜 갈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여행에 있어 우성은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도 좋아요. 저것도 좋아요. 이것도 맛있어요. 저것도 맛있어요. 농구장은 있어요? 좋게 말하면 뭘 하든 까다롭지 않고 수더분했고, 나쁘게 말하면 취향이 없고 꼼꼼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여행의 모든 진두지휘권은 명헌이 갖고 있었다. 명헌은 코앞의 상대부터 골대 밑에 자리 잡은 상대까지 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의 멍한 눈동자와 뚱한 표정은, 잘 뜯어보면 오만가지 생각으로 촘촘히 직조되어 있었다. 우성은 그 생각의 피륙을 존경했고, 그 피륙을 이루는 생각의 실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쓰이는 순간을 사랑했다. 정우성이란 이름으로 라벨이 붙은 그 생각의 실타래 색은 붉었다.

 

신혼여행으로 무슨 미국이야. 미국은 안 돼.

왜요? 가면 말도 잘 통하고. 내 차도 끌 수 있잖아요.

너 사는 데잖아. 맨날 가는 데를 여행으로 왜 가.

나도 못 가본 지역 많아요. 미국이 얼마나 넓은데.

 

우성은 계획이 없는 편이지, 고집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가면 혜택도 많이 받아요! 그래도 명헌은 단호했다. 미국은 안 된댔다. 유럽에서 골라. 안경을 쓴 명헌은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안경알 위로 파란색의 사진이 스쳐 지나갔다. 유럽 어딘가의 바다인 모양이었다. 우성은 노트북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의 노트북에는 방금까지 미국 지도가 켜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강압적이에요. 여행 혼자 가요?

뭐?

 

명헌의 고개가 그제야 들렸다. 그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성은 굳이 다시 대답했다. 여행 혼자 가냐고요. 이거 신혼여행 아니에요? 명헌이 안경을 벗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웨딩 촬영을 앞두고 평소보다도 길게 기르고 있는 머리카락이 그의 손을 타고 올올이 흐트러졌다.

 

너 미국 가면 네 일도 볼 거 아니야. 아니야?

겸사겸사 그러면 좋죠. 결혼 준비한다고 미룬 일이 얼만데.

난 그게 싫다고. 미국 매번 가는데 신혼여행마저도 미국으로 가야겠어?

그러니까 미국에서 안 가본 곳으로 가자고요.

 

얘기는 공회전이었다. 연애만 10년. 아무리 서로 바쁜 장거리 커플이었어도 세월이 세월인지라 여기저기 쏘다니기도 많이 쏘다녔었다. 그때마다 약간의 의견 조율은 했었지만 이렇게 첫 단추부터 미끄러진 적은 없었다. 명헌은 딱, 딱, 딱, 딱,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해 인터넷 창을 껐다. 이런 기분으로는 미국이든 유럽이든 다 고깝게 보일 게 빤했다. 우성은 팔짱을 꼈다. 틀린 말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들은 체도 안 하고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는 명헌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잠깐 쉬는 시간에 내 일 할 것 좀 한다는데 왜 그래요? 형도 그러잖아요. 아까도 줌 회의하고.

이거랑 그거랑 같아? 지금 우리 신혼여행 왔어?

나한텐 그게 그거예요. 형이야 여기 있으니까 자기 일 다 하면서 결혼 준비하지. 난 내 개인적인 일 다 미뤄놓고 왔잖아요. 그것 좀 이해해 달라니까요?

그래서 신혼여행 가서 너는 너 할 거 하겠다고?

하루 종일 하겠대요? 아니잖아요.

그렇게 바쁘면서 결혼은 왜 해.

뭐라고요?

 

 

우성이 찾아낸 곳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만큼 은근하게 숨어있는 술집이었다. 너무 조용하고 기척이 없어 문을 연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우성은 바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왁자한 분위기가 싫어 인적이 드문 곳을 일부러 찾아온 거긴 하지만, 그렇대도 이렇게 삭막할 정도의 고요를 바란 건 아니었기에 우성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장사… 하시는 거죠?”

“예, 합니다…….”

 

우성의 말에 주인장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프레첼이 담긴 작은 그릇을 밀어주었다. 보는 사람까지 맥 빠지게 하는 과도한 무기력에 우성의 큰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웨이브가 들어간 긴 장발의 주인장은 손님이 없어 소용도 없는 와인 잔을 닦으며 말했다. 부산 토박이인지 힘 빠진 말투마저도 리드미컬했다.

 

“손님이 잘 안 와갖꼬… 오늘이 끝입니다. 내일부턴 문 닫으려꼬요.”

“아, 정말요?”

“예. 애 마이 썼는데…. 잘 되기가 쉽지 않네요.”

 

애 마이 썼는데 잘 되기가 쉽지 않네요. 그 말은 결혼을 앞둔 애인과 서랍장을 조립하는 문제로 싸우고 대책 없이 부산으로 달려온 우성에게 굉장한 감흥을 줬다. 마음이 찡하고 울려왔다. 어쩐지 이 무기력한 웨이브 장발의 남자라면 자신의 심정을 다 이해해 주고도 남을 것 같았다. 우성은 결연하게 메뉴판을 쥐었다. NBA 리그의 남자, 우성의 결심이었다.

 

“사장님.”

“예에…”

“일단 이거 한 잔씩 다 마실게요.”

 

 

명헌은 안경을 벗고 기지개를 켰다. 어느덧 밤이 깊어있었다. 명헌은 택배 박스의 종이테이프를 뜯은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청첩장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활자의 프린팅 상태를 체크하느라 똑같은 글자를 골백번 봐서 그런지 이젠 자기 이름조차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눈이 때꾼했다. 핸드폰은 아직도 잠잠했다. 우성에겐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도대체.”

 

우성은 한국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시간이 꽤 흐른 터라 소원해진 듯했고, 중학교 때 친구들은 그 당시 농구부 내에 있었던 불화 이후로 전부 연락을 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는 종종 연락을 하는 듯했지만 애초에 사는 곳이 다르니 예전만큼 가깝게 지내지 못했고 더군다나 명헌과의 연애에 있어서는 굳이 그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성을 알고, 명헌은 더 잘 아는 농구부 멤버들이었다.

 

“애들이랑 있나…”

 

명헌의 손이 메신저 채팅 목록에서 배회했다. 하지만 섣부르게 그 누구에게도 우성의 거취를 묻지 않는 것은 우성이 농구부 멤버들과 함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다면 아직까지 핸드폰이 잠잠할 리 없었다. 아무리 우성을 애지중지한 형들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더 가까운 것은 명헌이었기에, 누가 됐든 넌지시 연락을 했을 게 빤했다. 명헌은 연락을 포기했다. 괜히 들쑤셔봤자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었다.

 

“……”

 

명헌은 차곡차곡 쌓인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멀쩡한 것들 중 다섯 개를 빼 봉투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아직 봉투를 봉하지도, 봉투에 이름을 쓰지도 못했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자신이 없어진 탓이었다. 이름을 쓰는 순간 파본이 될 것 같은 불안이 들었다. 저걸 전해줄 수 있을까. 시간은 늦었고, 우성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 액정 속 턱시도를 빼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가게로 들어오려던 여자 둘이 뒷걸음을 쳤다. “야, 빽. 빽 해라.” “왜?” “뭐 미친놈 둘이 노래를 부르는데?” “돌았나. 상종 못할 곳이네. 여기 이름이 뭐냐?”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¹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우성은 두 바퀴를 돌았다. 그러니까, 메뉴판에 빼곡히 적힌 주류 리스트를. 두 바퀴 하고도 네 번째 메뉴인 아그와밤을 마시기 시작할 무렵에는 완전히 맛이 갔다. 문제는 웨이브 장발의 주인장도 같이 취했다는 것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의미 없이 유리잔을 닦던 그는 우성이 메뉴판 반 바퀴를 돌았을 무렵 아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 마시듯 양주를 들이켜며 이름 까고 나이 까고 직업 까고 형님 아우 의형제를 맺어버렸다. 농구는 몰라도 어디선가 들어본 NBA라는 말에 웨이브 장발의 주인장이 너 잘나간다며 감탄에 경탄을 마지않자 우성은 팬 서비스라며 셀카를 찍자고 제안했다. 둘이 따봉도 하고 손 하트도 만들며 오붓하게 사진을 찍었다.

거기까지 했으면 좋았을 것을. 술이 들어가니 웨이브 장발 주인장도, 캡을 눌러쓴 우성도 울컥 감정이 북받친 것이었다. 영업 종료라니. 이젠 진짜 끝이다, 끝. 웨이브 장발 주인장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고 그 말에 술이 오를 대로 오른 우성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엎드렸다. 형, 저도 끝이에요. 다 끝났어요. 아우야. 형님.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만난 지 네 시간 만에 일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은 이제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핸드폰으로 슬픈 노래 켜고 청승이나 떨던 게 아닌 밤중에 디너쇼가 된 것은 토이의 ‘뜨거운 안녕’ 덕분이었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². 둘은 하이라이트 구간에서 짠 듯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애써 온 손님마저 뒷걸음치게 만든 두 남자의 콘서트가. 물론 우성이 메뉴판 두 바퀴 반을 돌았으므로 매상 면에서 손해 볼 것 없는 무대이기는 했을 터였다.

그렇게 웨이브 장발 주인장과 우성의 눈물 줄줄 이별 대행진이 있던 밤. 우성은 완전히, 속된 말로 꼴아버렸다.

 

 

산왕공고 청첩 모임

12:00~15:00 강남구 일대

 

지각 클리셰의 3요소. 눈부신 햇살, 인위적일 만큼 청량한 새소리,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평화로움. 눈을 떴을 때 이 세 가지를 느꼈다면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성은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그랬다. 지각보다, 아니 지각보다 더 강력한 파혼의 클리셰가 저세상 간 우성의 정신머리를 순식간에 이 세계로 데려온 것이었다. 우성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지? 분명 노래하고 있었는데 왜 여기지? 지금 몇 시지? 그는 당장 이불을 뒤척이며 핸드폰을 찾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든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야 했는데, 이불은 가벼웠고 주위는 조용했다. 벗지도 않은 재킷의 주머니를 뒤지니 덜렁 지갑과 에어팟만 손에 잡혔다. 우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 벌어질 거다.

그 순간, 우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친애하는 산왕공고 형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 오늘……

 

“……망했다.”

 

 

「정우성 어디야」

 

수많은 노란 말풍선 위로 새로운 말풍선이 떴다. 1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명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좀처럼 닿지 않는 연락에 명헌은 밤잠을 설쳤다. 한두 시면 어련히 알아서 들어오겠거니 하던 게 세 시쯤 가까워지자 근처 호텔에라도 갔나, 다섯 시가 되자 정말 미국에 가버린 걸까, 여덟 시가 넘어서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로 바뀌어갔다. 빌어먹을 상상은 점점 심각하고 비극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무슨 일이 났으면 무슨 일이 났다고 연락이라도 와야 정상이었다. 어느덧 아침이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든 발견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니까.

우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마 자신일 것이었다. 우성이 떠났다. 모든 연락을 끊고, 300장의 청첩장만 남긴 채로 홀연히. 명헌은 침대에 무너지듯 걸터앉았다. 모임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명헌은 다짐했다.

이제 진짜 끝이다. 모임이 끝날 때까지 안 오면 정말 파혼이야.

 

 

“광처얼…… 전화 좀 받아아아……….”

 

우성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엎어졌다. 머리카락이 있는 건 좋은 거구나. 마음껏 자해를 할 수 있으니까. 우성은 왜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잘못을 속죄하기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머리를 달고 있으면 뭐 하냐. 중요한 날을 기억도 못 하는데. 잔뜩 구겨진 머리를 농구공 붙잡듯 붙들고 뜯고 있으려니 맞은편에 선 직원이 걱정스레 우성을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아니요오오…….”

 

우성은 엎어진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는 신호음만 갈 뿐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자신의 핸드폰은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어디서 나뒹굴고 있는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엄마인 미숙마저도 통화가 안 돼 이제 정말 믿을 구석은 아빠인 광철뿐이었다. 광철 제발………. 우성은 오늘만큼 광철의 나잇값 못 하는 발랄한 목소리가 그리운 적이 없었다.

명헌에게는 전화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우성이 명헌의 핸드폰 번호를 몰랐던 탓이었다. 어디서 털린 건지 기자들이며 방송 작가들로부터 개인적인 연락이 잦아진 명헌은 어느 날 우성에게 제대로 말도 않고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우성의 전화번호와는 하나도 같은 구석이 없는 번호로. 그래서 못 외웠다. 정확히는 굳이 외우지 않았다. 핸드폰은 늘 손에 쥐고 있었고, 연락이야 늘 했으니까. 우성은 그 열한 자리조차 외우지 않은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는 건 예전 번호였다.

통화 연결 음이 이명처럼 들릴 무렵에야 우성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기억나는 번호로는 전부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 이제는 머리보다 몸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우성은 호텔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 빌어먹을 가게로 다시 가야만 했다.

 

<영업종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핑핑 도는 머리로 몇 번 길을 빙빙 돈 끝에 찾아낸, 티도 안 나게 숨어 있는 가게의 문짝에는 언제 붙였는지 괴발개발로 쓴 영업종료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웨이브 장발 주인장이 만취한 와중에도 미련스럽게 한 마디 쓴 모양이었다. 하! 우성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종료는 무슨 종료! 얼른 문 안 열어? 우성은 씩씩거리며 문을 흔들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우성은 손날을 문에 대고 얼굴을 바짝 붙여 안을 살폈다. 갖은 술병이 나뒹구는 안에 핸드폰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혹시 웨이브 장발 주인장이 가게에서 자고 있진 않을까. 우성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사장님! 안에 있어요?”

 

“형!! 문 열어!!! 혀엉!!!!” 어제 그렇게 불러댄 형님을 목 놓아 부르지만 역시나 감감무소식. 억대 연봉을 부르는 우성의 손과 발도 열리지 않은 유리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우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호텔을 빠져나올 때의 시간은 오전 열시 사십 분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헤맨 시간이며 이 앞에서 죽친 시간만 합치면 삼십 분은 족히 지났을 것이었다. 우성은 아스팔트 계단에 앉아 입술을 삐죽였다. 울고 싶었다.

아홉수에 결혼?

 

문득 우성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말이 머릿속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우성의 결혼 소식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스물아홉인 우성의 나이를 걸고넘어졌다. 명헌이가 서른이지? 왜, 서른 넘어가기 전에 결혼하고 싶대? 우성은 그때마다 제가 하자고 했다며 솔직히 얘기했지만, 그럼 십 중에 여섯은 이런 반응이었다. 일 년 만 참지. 아홉수에는 뭐 하면 안 돼.

그래서 그런 걸까. 내가 아홉수인데 결혼하자 해서 자꾸 다투고 일이 꼬이는 걸까. 우성은 뜨거워지는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오래 앉아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우성은 편의점에서 펜과 종이, 테이프를 사서 <영업종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위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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랙 배경 웨딩사진!

-정우성

 

 

명헌은 넥타이 매듭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공식 석상이나 중요한 자리에서는 나름 양복을 많이 입는데도, 유니폼이나 운동복이 아닌 옷은 아직도 어색했다. 서로의 위치를 묻느라 산왕공고 멤버들이 모여 있는 채팅창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말만 하면 말풍선 옆에 뜨는 숫자가 족족 사라졌다. 그런데도 하나는 곧 죽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성이었다.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우성은 받지 않았다. 명헌의 머릿속에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당장 가족이 될 광철과 미숙, 우성의 에이전시 사람들과 매니저들, 하다못해 바꾼 번호마저도 용케 알고 연락을 해대는 기자들. 혹시 우성이가 무슨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혹시 정이 일정보다 일찍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혹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정우성 선수 파파라치 찍힌 거 없느냐고, 물어보라면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헌은 어디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할 수 없었다. 한국에 와 있는 우성을 대신해 미국에서 갖은 일을 처리 중인 광철과 미숙을 걱정시킬 수는 없었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바보처럼 우성의 거취를 묻고 싶지 않았고, 안 그래도 무슨 일 없나 사사건건 자신들을 예의주시하는 기자들에게 나서서 먹잇감을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이가 별것도 아닌 일로 완전히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헌은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손으로 쓸었다. 가방 안에는 청첩장 다섯 장이 들어있었다. 아직 그 누구의 이름도 쓰이지 않은 채였다. 왼손 약지에 프러포즈 링이 반짝였다.

 

 

형, 우리 결혼해요. 응?

 

작은 창 안에 우성의 얼굴이 가득 차다가 이내 멀어졌다. 명헌은 캔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또 시작이다 뿅. 아하하. 형 애기 때 말투 썼다. 우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렸다. 포털 사이트의 화상 미팅 플랫폼이었다. 한국은 저녁, 미국은 아침. 우성은 아침부터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또 청혼을 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 청혼이었다. 명헌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번엔 또 왜?

그냐앙, 파티에 맨날 혼자 가는 것도 싫고요. 동료들이 오붓한 셀카 보내는 것도 질투 나고… 우리 준비할 것도 없는데 얼른 결혼해요.

준비할 게 왜 없어. 결혼 준비가 얼마나 빡센 지 모르는군용.

나 집도 있고, 차도 있고. 형도 있을 거 다 있잖아요. 그리고 애기 말투 쓰지 말아요. 보고 싶게.

우성, 우리 결혼한다고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용. 네가 원하는 거 못 해.

그렇지만…….

 

몰라요. 얼른 우리 결혼해……. 우성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부쩍 주변에 결혼하는 커플이 많다더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명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성이 얼마인지 감도 안 잡히는 반지를 내밀며 진짜로 청혼을 하기 전까진.

 

우리 결혼해요.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우성은 냅다 명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진짜 청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명헌은 얼떨떨한 얼굴로 우성을 내려다봤다. 한국 오전 일곱 시 십 분. 명헌의 집 현관이었고, 명헌은 잠옷 바람이었다.

…우성?

거절하지 마요. 거절할 이유 없잖아요.

 

꿈인가? 뺨 철썩. 하지만 우성은 그대로였다. 꿈 아니거든요? 명헌의 괜한 짓에 우성이 빽 소리를 질렀다. 명헌은 목을 벅벅 긁었다. 예상했던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진전됐다.

명헌이라고 우성과의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성도 자신도 아직 현역으로서는 한창이었고, 둘 다 리그를 떠날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결혼은 무의미했다. 서류상 귀속만 된 채 세월만 보낼 게 빤했다. 추억도, 기억도, 듬성듬성 간신히 채워진 채. 명헌은 충만한 결혼 생활을 원했다. 서류로의 귀속이 아니라 당장 곁에 있는 우성의 실체에게 귀속되고 싶었다. 그 부피와 무게에.

 

형, 빨리 손 줘요.

 

그렇기에 이런 식의 청혼은 명헌에게 달갑지 않았다. 그 기색은 얼굴에 금방 티가 났다. 우성이 입술을 삐죽였다. 맨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지도 10분은 지난 것 같았다. 물론 자세가 문제는 아니었다. 팔도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문제는 건장한 신체에 자리 잡은, 아직 덜 자란 마음이었다.

 

손 달라니까요.

일어나.

결혼하자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 형 이제 서른이잖아.

 

서른이랑 결혼이 무슨 상관이냔 말을 하려던 명헌의 입이 딱 다물렸다. 어느덧 우성이 붉어진 눈을 하고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것도 청혼이라고 쫙 빼입은 양복에 잔주름이 졌다. 우리 사랑하는데 왜 결혼 안 해. 나도 남편 갖고 싶어. 형 남편도 하고 싶어. 연애만 하고 싶으면 연애 같은 결혼생활하면 되잖아…… 명헌은 쪼그려앉아 우성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손에 닿는 뺨이 거칠었고 그 긴 비행시간 동안 잠도 못 잤는지 눈이 퀭했다. 그저 투정일 줄 알았는데 나름 맘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명헌은 마음이 약해졌다. 어차피 할 결혼, 조금 이른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보다 일러, 결혼이.

나랑 부부 할 거예요?

그럼 누구랑 해, 내가.

 

명헌이 왼손을 내밀었다. 우성은 훌쩍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래 끼워 생활감마저 느껴지는 커플링 위로 프러포즈 링이 올라갔다. 흠집 하나 없었고, 너무나도 무거웠다.

 

 

명헌은 프러포즈 링이 끼워진 왼손 약지를 바라보았다. 연애만 하고 싶으면 연애 같은 결혼생활하면 되잖아. 우성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니야, 우성아. 난 연애 같은 결혼 싫어. 결혼 같은 결혼이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식으로 서로 어린애처럼 구는 거 말고 말이야.

문이 열리는 기척에 명헌의 상념이 끝났다. 현철과 동오였다. “야. 차가 막힌다.” “날 되게 덥다.” 귀한 자리라 신경 쓴 게 티가 나는 둘의 모습에 명헌은 벌써 절반 넘게 동난 물을 들이켰다. 현철이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가볍게 물었다.

 

“우성이는 어디 갔냐?”

 

 

호텔로 돌아온 우성은 다시금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전화기를 마지막 희망처럼 붙들고 있었다. 미숙과 광철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뭐해, 꽝철! (훗날 전해 들은 바로, 미숙과 광철은 그날 저녁 한인 클럽 포크댄스 클래스를 들었다고 한다.)

더 이상 전화선에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우성은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어떻게든 빨리 명헌과 연락이 닿거나 명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입국할 때마다 한국이 낯선 우성이 오늘 모임 장소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장소 선정이며 예약은 전부 명헌이 했다. 그렇다면 우성은 집에라도 가 있어야 했다. 집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제일 빠른 서울행 KTX는 좌석이 없었다. 줄줄이 예약 대기가 걸려있었다. 예약 대기. 예약 대기. 예약 대기. 한 시간 반 뒤에 것을 간신히 예매했다. 현재 시각 열두시 오십분.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반이라니.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임이 끝나 있을 것이었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토이의 ‘뜨거운 안녕’ 하이라이트 소절이 끈질기게 떠올랐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이젠 안녕 이젠 안녕 이젠 안녕… 안 돼! 우성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지나가는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저기요. 혹시 서울 가세요?”

 

 

“요즘 감기 독하긴 하더라.”

“넌 괜찮냐?”

 

명헌은 작게 썬 관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걸 대접하겠다고 큰맘 먹고 주문한 음식들이 어떻게 넘어가는지 몰랐다.

오늘 우성은 아파서 못 온 것이 됐다. 하필이면 엊그제부터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너무나 아쉽게도 자리하지 못했다. 다들 명헌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며 도리어 걱정을 해주었다. 명헌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명헌의 종아리로 뭔가 툭 닿았다. 맞은편에 앉은 낙수가 심상찮은 눈길로 명헌을 보고 있었다.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 밑으로 세모난 눈이 바른대로 불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낙수는 눈치가 아주 빨랐다. 명헌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우성이랑 싸울 때마다 낙수한테 털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 너 이미 참을성의 제왕이다. 내 타이틀 너 줄게. 그냥 가져라. 돈 안 받는다.

 

어느 날 낙수는 명헌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 사회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로 우성과 명헌이 대판 싸우고 난 다음이었다.

어쨌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로 뛰다 보니 연예계 종사자들도 몇몇 알고 지냈지만, 명헌은 사회자는 적어도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어차피 미국에서도 작게나마 식을 올릴 계획이었기에, 국내에서 요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친지들과 비밀리에 소박하게 하길 바랐다. 하지만 우성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한 번 하는 웨딩 이왕이면 할 거 다 해보자는 주의였다. 사회자도 축가도 그럴싸한 연예인을 섭외하고 애프터 파티도 근사하게 하길 원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자를 누구로 할 것이냐부터 난관이었다. 명헌은 우리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결혼식을 진행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했고 우성은 죄다 운동선수인데 그럼 누구에게 부탁하느냐고 했다. 명헌은 현철을 물망에 올렸다. 우성이 질색했다.

 

안 돼! 그 형 나한테 이상한 거 시킬 거야!

뭘 이상한 걸 시켜.

형 안고 스쿼트 하기, 형 위에 태우고 팔굽혀펴기 같은 거! 그 형 분명 가만히 안 넘어갈걸요?

뭐, 못 해?

못 한다는 게 아니라… 하여튼 안 돼요! 차라리 동오 형으로 해!

 

이번엔 명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동오 그런 자리에서 긴장하는 타입이야.

차라리 긴장하는 게 낫지.

너 편하겠다고 하객으로 초대하는 애한테 부담 줄 순 없잖아.

그러니까 연예인 쓰자고요! 요즘 전문 엠씨 겸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낙수의 끈질긴 시선에도 명헌은 고개를 돌렸다. 낙수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타이틀을 넘겨줬다고는 해도, 한번 참을성의 왕자는 영원한 참을성의 왕자였다. 낙수는 모른 척해주리라. 명헌이 얘기하기 전까지는.

명헌은 그걸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한들,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핸드폰은 아직도 잠잠했고 눈치껏 힐긋거리는 미닫이문은 열릴 생각을 않았다. 식사는 벌써 코스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명헌의 거짓말 역시 그랬다.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결혼 준비의 세세한 것들까지, 사소하고도 구체적인 거짓말들도 5부 능선을 꺾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혼까지의 시간도 제일 높은 곳을 지나갔다. 눈앞엔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속절없이 굴러떨어질 만큼 위태로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명헌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환기가 절실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명헌은 잰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고작 이케아 서랍을 조립하다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이렇게 중요한 날 연락 하나 없이 잠수를 타는 게 맞는 걸까. 명헌의 입장에서는 모두 맞지 않았다. 우성과 사귀는 10년여의 세월 동안 이렇게까지 틀린 선택은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당연히 싸우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서로가 그렇게 잘 맞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의 극이 반대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명헌은 11년에 걸쳐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인정하고 용인하는 게 연애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결혼 역시 그 지점에 대한 인내를 전제하고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명헌에게는 그랬다.

그렇지만 우성은 어떤가. 미국에나 가버리라는 말이 상처였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홧김에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모든 걸 내던지고 소식 하나 없이 증발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화장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명헌은 최근 통화 목록을 빨갛게 물들인 번호를 눌렀다. 얼마나 켰다 껐다를 반복했는지 핸드폰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명헌은 지긋지긋한 통화 연결 음을 들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전화받아라.”

 

헛구역질처럼 욕지기가 올라왔다. 뿌득, 이가 갈렸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귓속을 파고드는 통화 연결 음이 인내가 끓어오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끓어오르는 인내가 넘쳐흘러 머리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결국 큰 소리가 나갔다.

 

“정우성, 이 미친 새끼야! 네가 결혼하자며! 청첩 모임 시작부터 잠수를 타? 당장 전화 안 받아?”

 

명헌의 목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부르르 끓어오른 인내가 덜컥거리는 머리의 틈새로 빠져나와 줄줄 흘렀다. 머리가 뜨거웠고 이마로 땀이 흘렀다. 명헌은 핸드폰을 쥔 채로 씩씩거렸다.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이젠 우성의 거취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전화나 받았으면 했다. 딱 한 마디만 하고 싶었다. 파혼해. 헤어져. 끝내. 다신 돌아오지 마.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지듯, 빨간색의 저장명이 한 줄 더 생겼다. 명헌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뒤늦게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명헌은 열기로 달아오른 손을 찬물에 대충 씻어내고 도망치듯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그리고 문 하나가 느리게 열렸다.

 

“정우성이랑 결혼……?”

 

명헌은 제대로 봤다. 대변기 세 칸의 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간과했다. 청소 도구함에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뭔 청소 도구함에 사람이야, 생각하겠지만 사람이 급하다 보면 내가 들어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기 마련이다.

 

“쟤 이명헌이잖아…?”

 

K-직장인은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게 문제다. 까라면 까야 하는 구조라 주말에도 상사에게 연락이 오면 어디든 기어 들어가서 나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사안을 해결해야 하는 게 문제다. 그게 특종에 양심을 파는 스포츠 일간지의 좌천당하기 일보 직전 김 기자라면 정말 큰 문제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온 김 기자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이번 주 가기 전에 특종 하나 잡아라」

「대박은 바라지도 않는다 중박이라도 해라」

 

「안 그럼 네가 소박맞아 새끼야」 막 도착한 세 번째 메시지를 확인하는 김 기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쓰고 있던 눈물의 사죄문을 잽싸게 지웠다. F 일간지의 신뢰 점수 제로, 좌천 대상자 불멸의 1위, 네티즌 선정 올해 최악의 기레기 김 기자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대박 하나 갑니다」

 

테이블 위로 느껴지는 진동에 여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명헌의 핸드폰으로 쏠렸다. 명헌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이내 실망했다. 소속팀 감독이었다.

 

“여보세요?”

 

야 너 어쩌다가 걸렸어? 아직 식당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 명헌의 되물음에도 감독은 제 할 말만 했다. 기사 떴어 인마. 너 지금 청첩 모임 중이야?

 

“기사요? 어디에요?”

 

그 말에 모두가 포크를 내려놓고 일사불란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느는 게 눈치, 프로 N 년 차면 느는 게 재빠른 상황 판단 능력이었다. 척 하면 척이었고 착 하면 착이었다. “아이씨……” 곧 현철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이고.” “미쳤나.” “누구야? 언제야?” “어떡해요……” 그 반응 끝에 명헌은 핸드폰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단독] NBA 스타 정우성♥제일 건설 이명헌 PG, 드디어 화촉 올리나? 저희 청첩 모임 중이에요~ (스포츠 ♥스토리)

 

별다른 내용 없이 타이틀만 떠 있는 기사엔 식당의 외관 사진이 떡하니 첨부돼 있었다. 하단에 작은 글씨로 친절한 설명.

 

정우성♥이명헌 커플의 청첩 모임이 진행 중인 강남구 모처의 식당.

 

어떤 기자인지는 몰라도 단단히 사악한 놈에게 걸린 게 틀림없었다. 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식당으로 문의가 빗발칠 게 분명했다. 명헌은 이마를 짚었다. 기사 뭐라고 내? 너 우성이랑 같이 있지? 감독의 말에 눈이 질끈 감기고야 만다.

 

“아뇨. 오늘 우성이 못 왔어요.”

- 뭐? 근데 기사가 왜 청첩 모임이라고 나?

“그게……”

 

명헌은 입을 딱 다물었다. 화장실에서의 사자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텐셔널 파울이었다. 자신의 치명적 실수. 명헌은 11년 전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마지막 인터하이 이후, 자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실수했을 때면 그것을 인텐셔널 파울이라 부르곤 했다. 나름의 방어기제였고 속죄의 의미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어도 아니고 속죄도 아니고, 따지자면 후회에 가까웠다. 열받는다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었는데. 복도에서 쪼그려 앉아 훌쩍이던 11년 전 앳된 우성을 다시 돌아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 얼굴 그대로, 마치 농구에서의 승패만큼 중요하다는 듯 고백하는 우성을 받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청혼을 하는 그 푸석하고 불쌍한 얼굴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는데.

 

“……있어요. 그런 게.”

- 어떡할 거야? 사무실로 전화 온 댄다. 우성이랑 대충 얘기 맞춰보고 연락 줘라. 일단 확인 중이라고 할 테니까.

“네……”

 

한숨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명헌은 전화를 마쳤다. “우성이한테 연락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동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리 아파도 하루 종일 잠만 자진 않을 거 아냐.” “불안하면 집에라도 다녀와.” 성구가 덧붙였다. 낙수가 옆에서 들으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명헌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젠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사실…… 우성이 연락 안 돼.”

 

어제부터 안 돼. 전화 안 받아.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야. 집에 애 없어. ……파혼할까 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근데요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연신 허리만 꾸벅거리던 우성이 말꼬리를 늘이며 눈치를 봤다. 앞에는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우성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가는 길목을 막고서는 “혹시 서울 가세요?”를 물어댄 벌이었다.

 

“입석 자리 난 거 없어요…?”

“아니. 그건 예약하신 순서대로 가는 거라니까요.”

“그렇지만 저 정말 급해요. 돈 더블로 드릴 수도 있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전산 시스템으로 처리하는 거라 제 마음대로 못 드려요. 그리고 예약 거신 분들이 다 급한 사람이지. 누구는 안 급해서 기다립니까?”

 

“자꾸 암표 유도하지 마세요. 또 그러시면 역무실로 모셔가요.” 역무원이 쐐기를 박고는 쯧쯧 혀를 차며 돌아갔다. 역사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소동에 술렁이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우성은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한시 이십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역무실에 들어가서 컴퓨터나 전화 좀 쓴다고 할까? 우성의 머리가 플랜 비, 씨, 디… 제트까지 떨어졌을지도 모를 다음 계획을 짜느라 바삐 돌았다. 일단 아까 그 역무원을 찾아가는 게 이러나저러나 최선이었다. 생각을 마친 우성이 발을 뗐다. 그때였다.

 

“정우성 선수…?”

 

우성의 옆으로 여자 두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골몰하느라 누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우성은 커다란 몸을 파드득 떨며 놀랐다.

 

“느, 네?”

“정우성 선수 맞으시죠?”

“아, 네. 아하하.”

 

우성은 머쓱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역무원에게 된통 혼나고 있었는데 그거 다 봤나. 근데 바빠 죽겠는데 웬 팬…. 우성은 여러모로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발이 바닥에서 들썩였다. 여자들은 우성의 대답에 사인을 해달라며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묻고는 대답도 안 듣고 핸드폰을 켰다. 우성은 건성으로 답하며 서둘러 사인을 했다.

 

“맞다! 진짜 결혼하세요?”

“네?”

 

허를 찌르는 질문에 우성의 손이 딱 멈췄다. 어떻게 알지? 내가 술 먹고 결혼한다고 소리라도 질렀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우성의 눈에 단발머리 여자가 비쳤다.

 

“기사 떴잖아요. 모르셨어요?”

“기, 기사요? 무슨 기사요?”

 

금시초문인 말에 이젠 펜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나… 어제 뭐 했냐? 이번엔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가 대뜸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본 우성의 눈이 떨어질 듯 커졌다. 화촉… 청첩 모임… 강남구 모처……?

 

“근데 왜 여기 계세요? 청첩 모임 안 가셨어요?”

“어? 그러게?”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순진하고 잔혹한 질문. 순간 우성의 동그란 두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몰라도 아마 명헌은 소속사와 입장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첫 번째 청첩 모임 날 연락이 안 되는 남편이라니. 어쩌면 입장은 ‘그런 사실 없다’로 정리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뿐이랴. 후속 기사로 ‘얼마 전 헤어졌다’는 소식이 안 나오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우성이 입술을 삐죽이며 눈물을 참자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줬다. 우성은 휴지로 눈물을 훔쳤다.

 

“저…… 핸드폰 없어져서 형이랑 연락이 안 되거든요. 오늘 청첩 모임 맞는데…….”

“어머, 그러시구나.”

“형이…… 화났을 거예요. 기사는 어떻게 났는지 몰라요.”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입 밖으로 내니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코까지 막혔다. 우성이 킁킁거리고 있자니 휴지를 건네준 여자가 능숙하게 휴지 몇 장을 겹쳐 내밀었다. “감삼다……” 우성은 팽 코를 풀고는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혹시 어디로 가세요? 저 서울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죄송해요. 저희는 서울 전에 내려서요.”

“괜찮, 괜찮아요.”

 

우성이 사인이 써진 종이를 내밀었다. 이제 역무실로 가서 차 지붕 위에라도 올려달라고 사정에 사정을 해볼 셈이었다. 그때 골똘히 우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단발머리 여자가 넌지시 입을 뗐다.

 

“저기, 우성 선수님.”

“네……”

“저희가 방금 찍은 인증 샷을 인스타에 올리는 건 어때요? 명헌 선수님 계정 태그 할게요.”

 

할렐루야. 우성은 자신의 머리 위로 따스한 구원의 빛 한 줄기가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시합 종료의 순간에도 버저비터가 있는 법이었다. 우성은 길쭉한 허리를 굽히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사가 나버렸으니 누구에게 들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우성은 명헌이 조용히, 비밀리에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그거 들어주다가는 조용한 결혼은 고사하고 조용히 끝장나기 딱 좋았기에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아니 이번 한 번도 눈 딱 감고 명헌의 말을 안 듣기로 했다. 영원한 이별보다는 맴매가 차라리 나았다. 맴매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이건 버저비터를 위한 슛이었다. 우성은 버저비터를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까. 우성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간절하게 손을 움직였다. 우성에게 손재주는 농구를 위한 것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그걸로는 부족했다. 마음을 돌릴 손재주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이케아 서랍장을 잘 조립할 수 있는 손재주도.

 

지은(@je_kkkkkk) 님이 회원님을 태그했습니다.

김차차(@chachacha) 님이 회원님을 태그했습니다.

@feel_damnn 님이 댓글에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lmh___ 와 씨 이게 되네

@0904_0404 님이 댓글에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lmh___ 명헌 선수!!!!

@super_ace_fan 님이 댓글에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lmh___ oppa DM plz:)

 

모든 걸 이실직고하는 명헌의 옆으로 연달아 뜨는 알람을 발견한 건 낙수였다. 다들 디저트로 나온 유자 아이스크림은 먹지도 못하고 팔자 눈썹이 되어선 명헌의 파혼 각 서는 얘기를 듣느라 정신이 없을 무렵이었다. 낙수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가느다래졌다.

 

“야, 야. 이명헌!”

 

낙수가 다급하게 명헌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수많은 알람 사이로 해시태그가 보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작은 아이폰 위로 여섯 개의 머리가 모여들었다. 명헌이 조심스럽게 알람 창을 슬라이드 했다. 그러자 인스타그램 게시글이 하나 떴다. 사인을 하고 있는 우성의 얼굴이었다.

 

“야, 이 새끼 이거 뭐야?”

 

결국 낙수가 소리를 질렀다. 짝. 어디선가 살갗이 맞부딪치는 소리도 났다. 현철이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친 모양이었다. “글 쓰여있는데요?” 현필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본문을 가리켰다. 우성의 사진에 한참 시선을 고정하던 명헌이 액정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올렸다.

 

#부산과_서울_사이 #정우성 #이명헌

부산역에서 우성 선수님 만났어요!

차표 교환하실 분 찾느라 고생하고 계시던ㅠㅠㅋㅋㅋㅋ (서울행 빠른 기차와 티켓 맞교환하실 분 찾아요!! 우성 선수님이 사례한대요!!!)

결혼 소식 여쭤보니 놀라셔서는 눈물 그렁그렁…

얘기 들어보니 핸드폰 없어져서 명헌 선수님이랑 연락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지랖 좀 부려봅니다!

명헌 선수님 우성 선수님이 진짜 잘못했대요!!! 지금 옆에서 싹싹 비는 중 싹싹 비는 중!!!!!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이건 우성 선수님이 쓰신 겁니당ㅋㅋㅋ 다른 말은 못 쓰시겠대요ㅋㅋㅋㅋ)

 

동그랗게 모인 머리들이 해시태그를 읽었다. “명헌이 형… 우성이가… 사랑해요.” 굳이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 읽은 것은 동오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팔자 눈썹에 심각했던 얼굴들이 차갑게 식어갔다.

 

“야. 파혼은 무슨. 결혼해야겠다.”

“댓글 달아도 되냐?”

 

낙수와 현철이 연달아 한소리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며 현필이 방긋 웃었다. 동오와 성구는 해시태그를 더 구경할 모양인지 나란히 붙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명헌은 물끄러미 게시글을 바라보았다. 몸의 맥이 탁 풀리면서도 너무 허탈해 울화가 치밀었고, 그러면서도 멀쩡한 얼굴을 보니 마음 한편이 이제야 조용히 가라앉았다. 정사각형을 가득 채운 우성의 얼굴은 카메라 애플리케이션 필터 덕에 더욱 뽀얗게 보였다. 예쁘장하게 보정이 되었지만 명헌은 알 수 있었다. 우성의 눈은 부어있었다. 이 나쁜 새끼. 뭐가 좋다고 웃어. 눈은 다 부어가지고…….

 

“야, 명헌아.”

“…….”

“너 우냐?”

 

 

#부산과_서울_사이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우성 선수가 서울을 못 가?????? 당장 달려가서 영접하고 내 차편이랑 바꿔드림ㅋㅋㅋ 나 따위는 늦게 가도 됩니다…(엄마 미안) 우성 선수가 꼭꼭 디엠 하라고 해주셨다! 흐흐 꼭 연락드려야지! 조심히 가세요 우성 선수!! 명헌이 형이랑 화해도 꼭 해!!!! 

 

#부산과_서울_사이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엄청 키 크신 분이 계속 안절부절못하시길래 누군가 했더니 유명한 농구 선수시라고~ 그래서 냉큼 끼어서 한 컷 찍었습니다 들어보니까 나익키 모델이시라네요!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서 뵌 듯? (어쩐지 잘 생겼더라!)

빠른 차편 구하셨다고 차 타러 뛰어가시는데 어찌나 빠르시던지ㅎㅎ 확실히 운동선수는 다르네요~ 태그는 다들 달길래 달아봤어요~ 기사 찾아보니까 결혼하신다던데~ 행복하셔요!

 

#부산과_서울_사이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케이티엑스 입석 칸에서 정우성 선수 사인회 열렸어요! 진짜 잘생기셨음ㅋㅋㅋ

꼭꼭 태그 달아달라고 하는 것도 넘 귀여운 것ㅠㅠ 다들 태그 많이 달아주세요! 우성이가 명헌이형 사랑한대요ㅎㅎㅎ

 

 

#명헌이형_우성이가_사랑해요

 

해시태그에 띄어쓰기는 있을 수 없다. 꼭 언더바로 어절을 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로 인식이 되지 않는다. 해시태그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은 그렇다. 바닥에 붙어서라도, 얇고 짧은 하나의 선으로라도, 꼭 이어지기. 사이사이를 간신하게 이으면서 아무리 바보 같고 못난 어절이라도 꼭 붙들기. 그리하여 온전히 하나가 되기.

명헌은 가만히 해시태그를 바라보았다. 명헌이형이 우성이를, 우성이가 사랑을 붙잡고 있는 그 문장은 안간힘을 쓰며 자신에게로 오고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무수한 언더바를 늘어놓은 것 같은 길고 긴 철도를 따라서.

주장과 에이스 사이, 선후배와 형 동생 사이, 형 동생과 연인 사이, 한국과 미국 사이. 명헌은 자신과 우성에게 있었던 그 수많은 사이들을 생각했다. 그 수많은 사이에서 우린 얼마나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또 때로는 얼마나 서로를 못마땅해하고 지겨워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헌이 우성의 고백을 받아주었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11년이라는 긴 시간의 사이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의 밑바닥에 깔린 언더바 덕분일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언더바.

 

[스포츠? 있슈!] ‘#부산과_서울_사이’ 정우성♥이명헌, 11년 농구 커플의 종착역은 결혼?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언더바는 기필코 자신들의 사이를 이어야 했기에, 그래서 파혼과 결혼의 사이까지도 이어버렸다. 파혼과 결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자신의 발밑에 뭐가 예쁘다고 또 그 사랑이라는 언더바를 그어버렸다. 제멋대로고 대책이라고는 없는, 지금 11년 농구 커플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오는 바보 같고 못난 애인이. 명헌은 우습게도 웃음이 났다. 에이스에겐 역시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 고백도, 그 청혼도, 지금 이 마지막 역전골도. 파혼으로 가는 길목에의 마지막 슛. 마치 버저비터처럼.

명헌은 자신과 우성과 그리고 사랑을 잇는 가느다랗고 끈질긴, 애절하고도 처절한 언더바를 다시금 믿어보기로 했다. 바보 같고 못난 어절이라도 꼭 붙들어보기로 했다. 명헌은 핸드폰을 쥐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빨간 줄이 그어진 애인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뜨거웠던 핸드폰이 이젠 갖은 연락과 알람으로 달아올랐다. 조용히 결혼하고 싶었는데. 핸드폰 번호도 바꿨는데. 하여간 말 안 들어.

우성이가 얘기했으니 이제는 명헌이형이 답할 차례였다. 만인에게 까발려진 지금 우리 사이.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연애를 하는 11년 동안 한 번도 겪지 못한 경험. 결혼은 또 얼마나 새로운 경험들을 줄까. 명헌은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응답해야 했다. 그 어떤 공식 발표보다도 강력한 한 줄을 써야 했다.

 

#부산과_서울_사이

 

한국과 미국 사이보다도 멀고 아찔했던 지금 이 사이. 하지만 이건 순전 물리적인 거리였다. 더 중요한 사이는 따로 있었다.

 

#파혼과_결혼_사이

 

명헌은 소리를 죽여 쿡쿡 웃었다. 이대로 올리면 큰일 나겠지. 전화통은 불이 날 거고 우성은 눈이 다 부을 정도로 엉엉 울 것이다. 바보 같고 못난 얼굴로. 명헌은 톡, 톡, 톡 해시태그를 지웠다. 잘 가. 이젠 입 밖으로도 꺼내지 못할 영원한 헤어짐아. 하지만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몇 번이고 떠오를 녀석아.

무엇인가를 쥐고 이렇게 오래 고민했던 적이 있을까. 볼은 패스하면 되고 나사는 상판에 끼우면 된다. 하지만 이 철없고 대책 없는 고백에는 책임을 넘길 플레이어도, 빼곡하게 쓰인 설명서도 없었다.

이런 손재주는 없어. 명헌은 생각했다. 손재주가 없는 손이 자판 위를 맴돌았다. 문득 청첩장 앞에서 펜을 쥐고 망설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던 순간이.

 

#

 

우리 사이에 사이가 또 필요할까? 크고 작은 사이는 이제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 이제 명헌은 그 어떤 빈틈도 없이 붙어 있고 싶었다. 시차가 없고 거리가 없는 곳에서 서로의 몸을 맞대고, 오롯한 부피와 질감과 무게를 느끼고 싶었다. 서로를 완전히 속박하고 귀속하는, 결혼 같은 결혼.

명헌은 그 어떤 말도 띄어 쓰지 않기로 했다. 가느다란 선도 긋지 않기로 했다. 길게 이어진 선을 줄이고 줄이며 달려오는 철없는 애인을 조금의 틈도 없이 맞이하기로 했다. 꼭 맞물려 완벽해지는, 행복을 만드는 우리집의 그 철제 서랍장처럼. ……물론 DIY를 같이하는 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만.

 

#우리집에서기다릴게

#청첩장에이름쓰자

 

 

 

 

 

 

 

 

 

<노래 출처>

¹ 정석원. 이젠 안녕. 1996.

² 유희열. 뜨거운 안녕.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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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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