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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걷겠다는 약속

w. 네리리

@nereeree

1.   

    그래서 우성이 나랑 결혼을 좀 해줬으면 해용.

……형,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한 번만 더 설명해주실래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해가 안 되나용?

형이 외계인이라는 것부터… 우리가 결혼해야 한다는 것까지요.

거의 다네용.

 

 

2.

우성은 미국행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며 고작 지난주의 대화를 회상했다. 옆자리의 명헌은 첫 번째 기내식을 챙겨먹고 이건 짜다, 이건 싱겁다는 평가까지 마친 뒤 곯아떨어졌다. 태양빛이 따가웠다.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창문 덮개를 내려달라고도 안 하고, 그렇다고 안대를 쓰지도 않고. 언제나 이런 식이다. 명헌의 이상한 배려는 우성을 슬프게 했다. 창문 덮개를 내리고 등받이를 젖혔다. 지금 자지 않으면 시차를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극초반 몇 년을 제외하면 시차 적응에 실패한 적 없었다. 하지만 우성은 열몇 시간 비행 내내 잠들지 못했다.

 

 

명헌은 익숙하게 공항 택시를 잡아 탔다. 주소를 말하는 발음도 자연스러웠다. 영어 자체를 잘하게 되었다기보다 그 주소를 많이 말해서 입에 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우성을 보러 미국에 올 때마다 마중을 극구 거부했다. 우성이 그 거부를 다시 거부하자 급기야 몇 월에 간다라는 힌트만 주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숨겼다.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택시 기사는 이 주소가 맞냐며 여러 번 되물었다. 언뜻 들어도 낯선 지역이었다. 

 

 

“여긴 길이 험해서 택시비 더 줘야 해.”

 

 

택시 기사의 말에 명헌이 우성을 돌아봤다. 택시 기사도 따라 백미러로 우성을 봤다. 뭐요. 내가 내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성은 뭐라 따지려다 관뒀다. 가요, 가. 앞좌석 헤드를 툭툭 치며 말했다. 택시 기사가 묘하게 들떠서는 엑셀을 밟았다.

 

 

지구 거점이라는 곳은 텍사스 농장의 거대한 속에 숨어 있었다. 겨우 오두막이었다. 여긴 진짜 농장인데요? 역시 장난치는 거죠? 푹푹 빠지는 흙길을 파헤치며 끝까지 의심했는데,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 달리 호화로웠다. 텔레비전 화면이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여기저기 돌멩이가 반짝였다.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같았다.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나마 가능한 비유가 그랬다. 방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외계인인가? 명헌도 외계인인데 우성은 괜히 겁 먹었다. 

 

 

“이명헌.”

“엑, 해남 포가?”

 

 

그곳에서 등장한 것은 정환이었다. 정환은 몇 년간 연애 소식 없던 명헌이 대뜸 결혼 상대를 데려온다길래 한참 불안해하던 중이었다. 그것이 우성이라 놀랐지만 티내지 않았다. 더욱이 고교 시절엔 둘을 의심한 적도 있었다. 명헌의 지구 일지에 우성의 이름이 매일매일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개미도 매일매일 등장했다. 그들의 행성엔 개미가 없었다. 어쨌든 우성은 미국으로 떠났고, 명헌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명헌에게 우성은 개미처럼 흥미로운 존재일 뿐이던가, 정환은 고민했다. 찜찜한 것은, 우성이 떠났음에도 명헌의 지구 일지엔 그가 여전하게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둘이 그런 사이인 줄은 몰랐군.”

 

 

장난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니냐, 이정환 형은 (언제 봤다고 형이래용.)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실망이다, 둘이 무슨 사이냐, 그 행성은 포가가 특산물이냐, 나도 보내달라, 징징대던 우성이 정환의 말에 입을 잠갔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겨우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인 정환은 당황했다. 한가로이 거점을 둘러보는 명헌에게 눈빛으로 에스오에스를 쳤다. 명헌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예의 그 무던한 말투로 말했다.

 

 

“삼 년 전에 헤어졌어용.”

“아.”

“근데 쟤밖에 없네용.”

“뭐가 나밖에 없어요?”

“정환, 준비 다 되었나용?”

“아, 응.”

“뭐가 나밖에 없냐구요. 아니, 왜 나밖에 없어요?”

 

 

흥분한 우성의 얼굴이 아이처럼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정환은 자신의 오해와 혼란을 납득할 수 있었다.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분류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귀었을 때도, 헤어졌을 때도, 결혼을 앞둔 지금도. 정환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려는데, 명헌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우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정환을 향해서였다. 우성이 입을 뻐끔거렸다.

 

 

“형, 무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예를 갖추세용!”

“네?”

“정환은 우리 행성의 황제예용. 함부로 목소리 높이지 마세용.”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의 행성엔 황제라는 지위도 없었다. 알 리 없는 우성은 화를 내려다 눈치를 봤다. 고개까지 푹 숙인 명헌을 보고, 결국 털썩 무릎 꿇었다. 이걸 믿는다고? 정환은 어쩔 줄 모르다가 둘의 머리를 삐걱삐걱 쓰다듬었다. 영화에서 본 황제 흉내를 낸 것이었다. 처음 맛보는 빡빡이의 촉감에 취해 한참을 그러다가 명헌에게 무언의 눈빛을 받았다. 명헌은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3.

“아, 아직 열지 마요!”

“용.”

“나 죽으면 어떡해요?”

“안 죽는다니까용.”

 

 

정환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문에 처넣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도 그럴 게 사십 분째 실랑이 중이었다. 실랑이보다는 우성의 일방적 생떼에 가까웠지만. 행성의 중력이나 대기가 나와 맞지 않아서 죽으면 어떡하냐는 나름 과학적인 우려부터 우주 미아가 되면 어떡하냐는 무리수까지 다채로웠다. 정환은 새삼 명헌의 사랑을 실감했다. 저 생떼를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받아줬다. 하지만 문 너머에 다른 행성이 있고, 그곳에서 결혼을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오직 명헌만 보고 응하는 우성은 또한 어떠한가. 끼리끼리군.

 

 

“우성.”

“녜.”

“너무 무서우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안 돼용.”

“형이 결혼하지 않으면 행성의 존속이 위태로우니까….”

“기억하네용.”

 

 

명헌의 행성의 잉태 방식은 지구와 아주 달랐다. 부부가 깊고 진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결혼하면 순수한 빛이 피어오른다. 그것을 바다 깊숙이 빠트리면 그해 겨울에 아이가 되어 떠오른다. 겨울이면 행성 사람들 모두 바다에 모여 아이를 건져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진다고 했다. 하지만 부부 사이의 유대감이 부실해지면서 극심한 저출산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솔직히 우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거의 거짓말이라 확신했다.  

 

 

“우성.”

“왜 자꾸 불러요.”

“사랑하는 우성아.”

“어, 어?”

“내가 사랑하는 우성이는 농구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래서 나는 농구하는 너를 너무 사랑해. 그러기로 선택한 데에 어떤 후회도 슬픔도 없어. 언젠가는 그 사실이 나를 죽일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그걸 방해하는 사람은 심지어 나 자신이라도 용서 못할 것 같아.

 

 

“다치게 두지 않아용. 절대용.” 

 

 

4.

우성과 명헌은 손을 마주잡고 문을 통과했다. 정환은 닫힌 문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5. 

우성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숨이 막히거나 몸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척박한 사막이나 초록색 괴생명체도 없었다. 다만 ‘환영합니다’가 육천 개의 언어로 쓰인 표지판이 흰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입국 심사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우성을 응시했다. 명헌이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별 생각 없이 따라가려던 우성은 제지 당했다.

 

 

“우성은 저쪽으로 가야지용.”

“네? 저, 저혼자요?”

“그럼용.”

 

 

고개를 돌리자 ‘저쪽'의 입국 심사관이 눈을 반짝였다. 우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미국을 오갈 때도 비슷한 과정을 수십 번 겪었다. 무의식적으로 여권을 꺼내려는데 주머니엔 지갑뿐이었다. 여권을 챙기라는 말은 없었는데. 신분증이라도 꺼내야 하나. 명헌을 훔쳐보니 손이 비어 있었다. 왠지 인자하게 웃던 입국 심사관이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요?”

“네?”

“가장 좋아하는 거요.”

“사람 중에서요?”

“꼭 사람일 필요 없어요. 세상 모든 것 중에서요.”

“농, 농구요.”

“카메라를 보고 다시 말씀해주세요.”

 

 

입국 심사관이 가리키는 곳에 동그란 카메라가 있었다. 우성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농구, 라고 말했다. 그 순간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와 연결된 네모난 기계에 불이 들어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털털 흔들리더니 손바닥 만한 뱃지를 뱉어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뱃지였다. 입국 심사관은 살풋 웃으며 그것을 우성에게 건넸다.

 

 

“왼쪽 가슴에 달고 들어가면 됩니다.”

“이게 뭔데요?”

“좋은 하루 되세요.”

 

 

입국 심사관은 쫓아내듯 우성을 등 떠밀었다. 명헌은 일찍이 심사를 마치고 우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헌의 왼쪽 가슴에도 우성의 것과 같은 뱃지가 달려 있었다. 다만 명헌의 것엔 회색빛 얼룩이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명헌이 우성의 뱃지를 뺏어 들곤 자세히 살폈다.

 

 

“역시 깨끗하군용.”

“이게 뭐예요? 형 거는 뭐가 묻었어요.”

“묻었으면 닦아줘용.”

 

 

장난스럽게 말하며 명헌은 뱃지의 핀을 벌렸다. 우성을 끌어당겨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얇은 반팔티를 입은 우성의 살을 찌르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손가락 끝이 간지럽게 닿아서 우성이 얼굴을 붉혔다. 알, 알겠어요. 저도 손을 들어 명헌의 뱃지 위 얼룩을 문질거렸다. 지워지지 않았다.

 

 

“왜 안 되지. 안 지워져요.”

“그런가용.”

“가서 바꿔달라고 할까요?”

“아니에용. 내 마음에 찌꺼기가 있어서 그래용.”

“네?”

“우성은 농구를 이렇게나 깨끗한 빛으로 좋아하고용.”

 

 

명헌이 우성의 뱃지를 톡톡 치며 말했다. 핀이 차가워서 우성은 몸을 움츠렸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 도통 이해하기 힘든 나의 형. 자신의 뱃지를 내려다봤다. 뱃지는 너무 희어서 오래 쳐다보면 눈이 아팠다. 

 

 

6. 

우성은 명헌의 안내를 따라 행성을 구경했다. 특별히 구경할 것도 없다며 민망하다는 듯 굴었지만 우성의 눈엔 온통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행성은 아주 작았다.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알짜배기는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모두 높다랬다. 맨꼭대기는 구름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우성을 감탄하게 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였다. 행성은 그림자로 뒤덮여 캄캄했는데 그것은 건물 때문이 아니라 나무 때문이었다. 건물의 오육 층까지 뻗은 나무가 한 발자국 걸러 있었다. 나무 기둥 사이로 어린 아이들과 개와 사슴과 정체 모를 동물들이 어울려 놀았다. 아이들은 맨발이었고 이따금 멈춰 서서 우성의 뱃지를 뚫어져라 봤다.

 

 

우성은 명헌과 둘만 남는 시간을 기다렸다. 정신없고 이상한 지구가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미룬 대화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명헌은 인기가 많았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특히 아이들이. 아이들은 서슴없이 명헌에게 안겼다. 그 품에서 부럽냐는 듯이 (전적으로 우성의 감상이다.) 우성을 올려봤다. 이 형이야? 아이들이 작게 물으면 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귓속말인 것 같은데 우성에게도 들렸다. 우성은 둘만 남게 되면 그에 대해서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형의 무엇으로 이해되는지. 

 

 

하지만 얼떨결에 결혼식장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7.

삼 년 전의 이별에 대해서 우성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얼굴을 했고, 애초에 왜 헤어졌는지도.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었다. 이별 직후에도 꿈을 꾼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했다. 다만 수지 타산이 맞는 이별이라고만 기억했고, 그 말은 오랫동안 이상하게 느껴졌다. 몇 개월 전 수지 타산의 정확한 뜻을 검색해본 적이 있다. 어떤 일이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따져보는 것. 우성은 그 문장을 곱씹다가 조금 울었다. 그리고 명헌과의 이별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8. 

우성은 전통 예복이라는 원피스를 자꾸 끌어내렸다. 명헌이 이름을 알려줬지만 우성에게는 그렇게만 보였다. 퉁퉁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결혼식은 지구처럼 성대하지 않았다. 하객조차 없었다. 주례자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만이 높은 단상에 서 있었다. 현철이나 적어도 꽝철은 데려왔어야 했는데, 우성은 뒤늦게 후회했다. 그렇지만서도 아름다웠다. 분홍과 연보라색 꽃이 사방에서 향을 풍겼다. 아치형 천장은 통유리라서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가 낱낱이 비쳤다. 이파리 사이사이를 겨우 통과한 햇빛이 조명처럼 침입했다. 그때 명헌의 손이 슬금슬금 우성의 손을 파고들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헉, 나 정말 결혼하나봐. 우성은 그 모든 아름다움보다 명헌의 체온 하나에 결혼을 실감했다.

 

 

“외계인과의 결혼은 곤란해. 게다가 그 엉망진창인 행성에서 왔단 말이지.”

 

 

정체 모를 서류를 펄럭이던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성의 뱃지를 확인했다. 시선이 매서웠다. 겁 먹은 우성이 명헌에게 바짝 붙어섰다. 결혼을 거부하면 어떡하지. 우성은 자신의 뱃지를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왠지 유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왼쪽 가슴을 슬쩍 내밀었다. 명헌은 긴장한 기색 없었다. 하지만 맞잡은 손에 땀이 고이는 것을 우성은 느꼈다.

 

 

“하지만 명헌이 장담한 것도 있고 하니.”

 

 

할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하고 손을 휘적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조명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입국 심사대에서의 카메라 플래시 같았다. 다만 잠깐 터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맹렬하게 이어졌다. 맨살이 화끈거렸다. 놀라 주춤대는 우성의 팔뚝을 명헌이 살살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도록 돌려세웠다. 애처롭게 떨리는 몸을 토닥였다. 질끈 감은 눈이 눈치없게 귀여웠다.

 

 

“우성, 눈 떠용.”

“못해요. 눈부시단 말이에요. 이게 뭐예요? 결혼식이 뭐 이래. 지구 가서 한 번 더 해요.”

“눈 떠봐용. 나만 보면 괜찮아용.”

 

 

우성은 명헌의 손바닥이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억울할 만큼 다정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너무 밝아서 허겁지겁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몇 번 반복했다. 아득하게나마 명헌이 보였다. 곧이어 거짓말 같은 광경에 숨을 삼켰다. 우성을 괴롭게 하던 것은 조명이 아니었다. 명헌에게서 피어오르는 빛이었다. 빛이면 빛이지 순수한 빛은 뭐냐고 툴툴거렸던 게 아까 전인데, 그것은 정말이지 순수한 빛이었다. 희고 깨끗하고 따뜻했다. 조금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것은 명헌이 거푸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주한 우성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명헌과의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치지기 시작했다. 요상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던 주장. 나를 서럽고 가쁘게 하던 침착함. 언젠가부터 오싹할 정도로 귀여워 보이던 얼굴. 쓰라린 패배와 서투른 첫키스. 나란히 서서 아이처럼 삼켜내던 아키타의 손. 손가락을 걸고 나눈 약속.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지던 형의 호흡. 사랑을 이야기하던 형의 편지. 형이 사라질까봐 불안해하던 매일매일과 그럼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풍만하던 순간들. 서로에게 있는 힘껏 생채기를 내던 삼 년 전의 어느 날. 그리고 지금이.

 

 

그런 것들이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흘러 지금에 닿았을 때 우성은 이미 울고 있었다.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만져지지 않는 빛을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쳤다. 방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웠던 광경이 이젠, 명헌이 그 기억들을 자신의 안에서 내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요. 우성은 명헌을 와락 끌어안았다. 명헌이 저를 떼어내려고 하는 게 느껴졌지만 버텼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건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로 자꾸 중얼거렸다. 우성아, 넌 잘못한 거 없어. 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이 감겼다. 내가 이기적인 거야. 

 

 

“나한테 너를 돌려줘.”

 

 

완전히 기절하기 직전에 우성은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9. 

그날, 지구인인 우성의 몸에서도 순수한 빛이 피어올랐다는 것은 먼 훗날까지 풍문으로 떠돌았다. 유일한 목격자인 할아버지는 이듬해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일에 대해 아무 말 않았다. 설명으로 설명될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 

나무 그림자 없이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찼다. 짠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성은 바다에서 눈을 떴다. 명헌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였다. 우성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지평선을 바라보던 명헌은 인기척에 고개를 내렸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살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명헌이 우성의 머리를 모래사장 위에 살살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없이 바다로 향한다. 그 오른손엔 순수한 빛이 들려 있었다. 우성은 뭐에 홀린 듯이 가만히 누워 명헌을 지켜봤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저런 사람은 사랑하지 않기가 더 힘들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오르자 명헌은 잠시 뒤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멀리 있는데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숨결이 닿았다. 파도가 명헌과 부딪히며 부서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명헌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성은 바다 깊은 곳에 순수한 빛을 적셔내는 명헌을 상상하며 그를 기다렸다.

 

 

아직은 더웠다. 올겨울에는 이 바다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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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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