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佑命

w. 팡

@r1avlxkd

佑命

 

 결혼이라는 건 무엇인가. 흔히들 연인 관계인 이성 커플 한 쌍의 결합이라 말한다. 요즘은 이성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지만 보편적인 시선은 그렇단다. 그럼 누군가는 나와 형의 사이를 부정한다는 건가. 내가 선택한 나의 인생은 부정당하는 걸까. 아무래도, 이를 자세히 논하기 전 결혼의 보편적인 전 단계인 연애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봐야겠다. 

 사전적 의미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 라 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식을 올린지 7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사랑이 싹트는 명확한 원인을 아직 모르겠다. 사랑은 대체 무엇이길래 생전 남이었던 사람을 책임지고픈 마음을 품게 하는건지. 자연스레 하던 말도 그 사람 앞에서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게 되는 이유는 뭔지. 생각치도 못한 일을 충동적으로 하게 되는지. 이 책을 완성하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6월 3일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30일 뒤. 1주년 기념으로 무엇을 해줘야 할까 많이 고민했다. 돈 몇 푼이면 살 수 있는 공장제 물건만으로는 형을 향한 내 사랑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고, 너무 비싸면 형이 싫어하니까. 농구 선수이자 남편으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을 담은 에세이북을 선물하기로 했다. 물론 이것저것 더 얹어서 줄 예정이다. 내 연봉 생각하면 이 정도는 해야지. 부디 나의 형편 없었던 프로포즈가 형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잊혀지길 바란다.
/ ‘작가(정우성)의 말’ 중

 

 정우성은 산왕을 떠나고 나서 더욱 가파르게 성장했다. 더 이상 경기 도중 집중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사진이 걸린 스포츠 브랜드 광고가 대중교통과 길거리를 채웠다. 인스타에 올라온 셀카에 찍힌 옷은 하루만에 품절됐다. 동양인 최초 NBA 진출. FIBA 창설 이래 최고의 미남. 아키타현 최고 아웃풋. 마이클 조던의 뒤를 이을 포인트가드. 고교 농구 선수들의 롤모델 1위. 신 들린 노룩패스. 각종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기자들은 그의 모든 행보에 주목했다. 스캔들, 실력 논란, 누가누가 더 농구를 잘하는가 등 온갖 토론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당당히 우승 트로피를 팀의 품에 안겨 주었다. NBA 데뷔 2년도 되지 않았던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전부, 예상대로였다.

 경기장을 나오는 우성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수많은 플래시가 쏟아졌다. 분명 이번에도 엄청난 기사가 쏟아지겠지. 인기 급상승 영상의 썸네일에는 틀림없이 제 얼굴이 박혀 있을 테다. 사람들은 모두 우성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고, 우성은 그에 걸맞는 적절한 반응을 했다. 전부 똑같아. 관심은 감사하지만 조금 지루한 걸. 눈살을 찌푸린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 선글라스를 쓴 슈퍼스타 정우성은 질문들을 거절하던 와중 기자 한 명에게 눈을 돌렸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분에게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아, 네. 매니저님 잠시만요.”

 그가 기자의 질문을 받아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기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이크를 거두고 필기용 도구들을 손에 들었다. 분명 다음 질문거리를 준비하고 있겠지. 이번에는 내가 뱉은 문장이 어떤 식으로 날조될까. 잠시 생각한 우성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현장에 있던 누군가에 의하면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를 닮았다고.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럼에도 이 경기를 보고 있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요? 처음으로 우승하는 순간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남은 일정만 끝나면 바로 만나러 갈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줄게요.”

 프로 데뷔 이후 첫 인터뷰 영상이 공개되고 정확히 일주일 뒤. 정우성은 자신의 SNS 계정으로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을 알리고, 바로 다음날 혼인신고부터 서약식까지의 모든 장면을 생중계했다. 국내에서는 동성혼 법제화가 되지 않았으니 결혼할 사람을 미국으로 불렀고, 둘 다 현역으로 뛰고 있으니까 은퇴 전까지 동거는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동시에 그의 배우자가 국내 프로 농구선수 이명헌이며,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라이브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우성과 명헌의 입 맞추는 사진은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했고, 모든 TV와 라디오 채널의 앵커들이 둘의 사랑을 보도했다. 실시간 검색어에는 오랫동안 ’정우성 결혼’ ‘이명헌 결혼’ 이 올라와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심지어 예능에서도 어쩌다가 사귀게 된 건지 물어봤다. 농구 커뮤니티의 토론 주제가 하나 더 늘었다. 전 세계가 그들을 주목했다. 이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뭇잎이 익어가기 시작하는 9월. 이명헌은 정우성을 보낸 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화려한 덩크에 심장이 내려앉았던 작년 봄부터 졸업하기 전까지 명헌은 한번도 우성을 좋아한다 티내지 않았다. 사랑보다 제 앞의 농구가 더 중요했고 정우성도 그럴 게 뻔했으니까. 무엇보다 우성에게 명헌은 멋진 주장이지 연애 대상이 아니니까. 이뤄지지 않을게 당연하다 생각했기에 농구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도 없었다. 명헌의 매일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그와 보낸 마지막 봄에 잡은 벚꽃잎에게 왜 제 사랑을 이루어주지 않았냐고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친 건지 아냐고 텅 빈 운동장에서 중얼거렸던 것이 전부였다.  

시든 뒤에야 곧게 설 수 있게 된 꽃잎에서 본인을 비추어 본 걸까.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뿅 다음 말투는 결국 삐뇽이 되었다. 

패배는 우승으로 덮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당장 윈터컵이 코앞이었고, 고작 에이스 하나 떠난 거 가지고 무너지면 안 될 시기였다. 옛적부터 주전 선수들의 능력을 알아본 대학이 하나둘 추천서를 보내기 시작하여 더욱 윈터컵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했다. 비어버린 슈팅 가드 자리에는 김낙수와 최동오가 번갈아 들어갔다. 신현필의 실력도 나날이 늘어 윈터컵에서는 골 밑이 아닌 곳에서도 점수를 낼 수 있게 됐다. 3학년의 졸업 후, 유일하게 인터하이에서의 패배를 기억하는 현필은 차기 주장 후보가 되었고 명헌과 현철 그리고 동오는 농구 선수의 길을 걷기 위해 스포츠 명문 대학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정대만과 이정환을 만나 적잖이 당황했지만 공통점이 많아 의외로 빨리 친해졌다. 

정우성이 없는 삶은 나름 괜찮았다. 처음에는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지만 이명헌답게 금방 적응했다. 대학 농구팀에서도 주장을 맡았고 그는 여전히 최고의 포인트가드였다. 그러나 우성은 괜찮지 못했다.

 

이건 부끄러워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건데 여기서만 슬쩍 꺼내본다. 처음 귀국했을때 명헌이 형에게 미국 생활이 너무 즐거워서 금방 적응했다고 떵떵거렸는데 사실 진짜 힘들었다. 솔직히 형은 그 자리에서 전부 눈치챘겠지만 (아닐 수도 있음) 아직까지 모른 척 해주는거라면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진짜 고마워요 사랑해요. 오랜만에 만난 김에 포인트가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산왕 때보다 더욱 멋있어진 형의 모습에 설레서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어쩌다가 머리에 농구밖에 없는 형을 사랑하게 됐나 하며 울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써내릴 수 있으니 글은 정말 좋은 것 같다. 고등학교 때부터 책과는 거리를 뒀는데 이제 소설도 읽고 글도 조금씩 써봐야겠다. 명헌이 형이 읽던 sf물을 따라 읽어볼까. 형은 유독 외계인이 나오는 작품을 좋아하던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 2-1 ’하마터면 고백할 뻔했다‘ 중

 

 미국에 도착한 첫 달, 우성은 향수병에 걸렸다. 매일 먹던 아침식사가 그리웠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자고 싶었고, 시도 때도 없이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농구를 배우는데도 배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인삿말 말고 다른 회화도 배우고 올 걸, 조금 후회했다. 벤치에도 못 앉는 것들에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 당하는 현실이 억울했다. 그럼에도 돌아가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농구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거니까. 정우성은 벽을 마주하면 돌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악착같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숙소 밖으로 나오고 가장 마지막에 자러 들어갔다.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면 사진을 들여다봤고, 영상통화를 하고, 메신저로 선배들에게 안부를 남겼다.

 ‘성구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은 선배만큼 큰 가드와 매치업을 했는데요, 저희 나라에서는 틀림없이 선배처럼 빅맨이 됐을 사람이 가드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역시 미국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리바운드는 선배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여기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현철 선배만한 키를 가지고 있어요. 같은 방 룸메이트도 고등학생 때 키가 20센치가 넘게 컸다 하더라고요. 아파서 잠도 못 잤다던데 처음으로 선배가 걱정됐어요. 잘 지내시죠? 항상 암바 걸릴 말만 하긴 했지만... 산왕에서 같이 농구하던 시절이 그립네요.’


‘현필아! 오늘 처음으로 너랑 비슷한 덩치의 선수를 봤다. 미국이 확실히 차원이 다른 곳이긴 하지만 너만한 피지컬을 찾아보기는 힘들더라.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계속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궁금하네. 마지막으로 봤던 연습경기 3점 슛 진짜 멋있었다!’


‘정씨~ 나 없다고 매일 울고 있는 거 아니지? 내 걱정 말고 몸 잘 챙겨. 그쪽은 슬슬 장마 기간이라며? 여름 감기는 독하니까 더 조심하고. 타지에 있는 동안 가족이 아프다는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아.‘


‘명헌이 형, 이제 제 포지션은 포인트가드로 굳혀져 가는 것 같아요. 남의 패스를 받기만 했는데 주는 사람이 되니까 엄청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오늘 존프레스를 당해봤는데 두 선수끼리 호흡이 안 맞고 계속 틈이 보이길래 그냥 바로 뚫어버렸어요. 형이랑 저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형은 제 경기 보고 있어요? 난 항상 챙겨보거든요. 형은 비록 포인트가드지만 저는 형이 던지는 3점 슛이 유독 마음에 들더라고요.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진짜 궁금한건데 메신저 앱 다 놔두고 왜 이메일만 쓰는 거예요? 형 때문에 저도 번거롭잖아요! 이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더보기‘

 

 사실 어떤 계기로 형에게 사랑에 빠졌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눈 감았다 뜨니 스며들어 있었다고 할까. 나와 형이 하는 농구처럼, 밥을 먹은 뒤에는 양치를 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형을 사랑하게 됐다. 나도 사랑의 원인을 모르니까 주변 사람들이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는지 물어보면 대충 둘러대고는 한다. 산왕에 있을 때부터 다른 누구보다 형과 하는 원온원이 제일 재미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사랑일 거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고 있었다. 형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을 터트렸던 날, 전혀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 뜬금없이 울어버린 이유를 나는 계속 몰랐던 것이다. 

형은 내가 없는 곳에서도 반짝거렸다. 코트 위의 사령관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형이 다른 선수에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났다. 저 손 끝은 지난 몇 년간 나를 향해 있었는데. 내가 아닌 사람과 손뼉을 치고, 잘했다며 등을 두드리고... 나도 분위기를 따라 즐거워했어야 하는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 3-3 ‘모든 것의 원인‘ 중

 


명헌은 우성과의 말다툼 때문에 꿀 같은 주말 하루를 싸그리 날려먹고 말았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런 미소를 지어주면 어떡하냐고 형은 사람이 무섭지 않냐는 등 갑작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더니 동료가 잘해도 칭찬해주지 말라는 말이나 했다. 이명헌은 주장인데. 일방적인 우성의 분노에 기가 막혀서 몇 마디 했더니 자기 혼자 울먹거리다가 전화를 끊고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해봐야 하나, 생각했지만 이명헌도 사랑 앞에서는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쉽게 휴대폰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성... 그쪽은 아침이겠지. 밥 챙겨먹고 나왔어용?“
”네, 평소처럼 시리얼에 아몬드 브리즈 부어 먹었어요. 그나저나 목소리가 왜 그래. 형 그동안 술 안 마시더니 나랑 싸운 것 때문에 그래요?“
”그래, 마음이 복잡해서용. 솔직히 우리가 왜 싸워야 했는지도 모르겠고용. 남자끼리 경기 중에 몸 좀 부딪히는거 가지고 화가 났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용. 특히 정우성 너는 누구보다 잘 알면서.”

”알아요, 아는데... ...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걸 어떡해요. 건방지게 먼저 화낸 건 미안해요.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웃어주는 건 못 봐요. 질투나요. 소문 뿐이긴 했지만 산왕에서도 운동부원끼리 사귄다는 말도 돌았고, 여기서는 아예 대놓고 연애를 한다고요. 거기도 그런 쪽인 사람이 있을 거 아니예요. 형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텐데 막 귀엽, 아니 아니 멋있게 웃고 다니면,”

“잠시만. 듣다 보니 좀 이상한데용. 내가 네 애인이야?”
”애인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
“정우성. 길게 말 안 해. 집에서 기다릴게용. 내일 하루는 비는 거 알고 있어용.”
“... 만나러 갈게요.“
”용. 그리고 귀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에? 에? 저, 여보세요?“


 정규 리그 시작 일주일 전, 오전 10시. 정우성은 맨몸으로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당일 오후 11시에 미국으로 떠났다. 어떤 경위로 한국에 들렀는지는 매니저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나,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입국 심사 도중 찍힌 안절부절 못하던 모습이 출국 사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소속 팀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다며 취재에 응해주지 않아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동시에 전부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정우성은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제가 7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아서 책을 쓸 건데요 형 어때요 저 멋지죠 대견하죠. 그때 형이 먼저 프로포즈 했을때 진짜 고마웠는데 내가 농구는 잘하지만 글을 못 써가지고 좀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형은 편지도 기가 막히게 쓰던데 누구 남편이길래 못하는 게 없어요 어쩌고저쩌고. 서프라이즈 이벤트였기에 나름 숨기겠다고 제대로 대답 안 했지만 지나가는 고양이가 봐도 뭔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버진로드 위에서 웃던 명헌이 형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도전하는 것이 곧 삶의 목표였던 나에게 형은 죽을 때까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줄 테니까, 형과 함께라면 지루한 인생을 보내진 않을 테다. 나는 영원히 형을 이기지 못할 테고, 형에게 질릴 일도 없을 테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결정한 앞으로의 삶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일반적인 정의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할 지라도.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했다면 미국으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 8-4 ‘신혼여행 첫날 밤’ 중

 

 

 정우성이 이상하다. 원래도 이상하고 바보 같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 마냥 입을 옴짝달짝 못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실실 웃는다. 저 얼굴이 귀엽지만 않았어도 산왕공고 시절 어깨 너머로 배운 암바 기술을 시도했을텐데. 한 달 뒤가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분명 자기 딴에는 뭔가를 준비하고 있겠지.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렇게 알리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혼 때는 허니 형 여보 서방님 온갖 염병을 떨더니 요즘은 재미없게 명헌이 형이라 부르는 이유나 알려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사랑이 엄청난 가호인 마냥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세 배로 되갚아주는 건 농구로도 충분하다. 보답을 바라고 시작한 사랑도 아니고,  그가 내 고백을 받아줄 이유도 없어 보였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도 기쁘게 축하해 줬을테다. 몇 주, 아니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힘들어할지라도. 왜 이뤄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주장과 에이스라는 이상적인 관계를 망치기 싫어서? 연애 따위가 정우성의 농구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 명백한 이유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자.

 나는 정우성과 달리 첫사랑을 정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사랑은 내게 대단하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흘러 들어오는 봄 냄새에도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는 고등학생이었고, 마음에 드는 얼굴을 보면 움찔했고. 기쁨 슬픔 분노 그리고 사랑. 흔하디 흔한 감정 중 하나. 특별하지도, 그러나 별 볼 일 없지도 않았고. 언젠가는 누굴 만나서 결혼하겠지 하는 짧은 잡념으로 그친 게 태반이었다. 중간고사가 다가오면 벚꽃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돌았던 것 같은데 당연하게도 믿지 않았다. 실제로도 이뤄지지 않았고. 어쩌다가 얘랑 결혼까지 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방금 내가 정우성의 결혼기념일 맞이 선물 겸 에세이 파일을 발견했고, 이 행위에 고의성은 한 스푼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메일 확인을 위해 잠시 우성의 노트북을 빌렸고, 실수로 구글 아이콘이 아닌 옆에 있던 다른 문서를 열어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장 창을 닫고 잊어버리는게 옳지만 이런 허술한 바보를 사랑하는 나는 정신이 나간 거나 다름 없으니까. 이건 모두 사랑에 눈이 돌아버린 탓이다. 모두 정우성 때문이다. 

 이어진 다음 문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배우자는 명헌이 형이 되어야만 했다. 형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 장난삼아 나가보던 미팅도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헌법 제 36조 1항에 의하면,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국내에서 형과 결혼할 수 없다면 해외에 나가서라도 결혼을 하고 싶었다. 10년 뒤의 내 곁에는 농구와 이명헌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래용 우성아.

 


 신혼여행 첫날 밤, 오랜만에 산왕공고 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형이 머리는 작고 몸통은 집채만한 소두 눈사람을 만들었던 것부터, 내가 현철 선배 같다며 빵 터지자 선배가 나를 눈 속에 묻어버렸지. 낙수 선배는 눈으로 뭔 조각상을 빚고 있던데. 동오 선배와 현필이는 눈토끼가 있나 산 주위를 둘러봤던가. 도 감독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다가 명헌이 형에게 눈덩이 하나를 맞으셨다. 그때 볼이 붉게 물든 명헌이 형이 왜 그토록 귀여워 보였는지, 이게 형과 보내는 10대의 마지막 겨울이라 생각하면 어째서 마음까지 차갑게 식어버리는지. 형을 사랑한 모든 순간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사랑이라는 마음을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도 안 하고 대충 선을 보고 결혼하거나, 평생 혼자 살았겠지. 내 인생에는 농구 뿐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미워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만 했지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없었으니까. 산왕공고 농구부의 선수들은 따분함만 가득하던 내 삶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명헌이 형은 낮에도 밤에도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 같다. 보이지 않아도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공통점이라고는 농구밖에 없는 에이스의 말동무가 되어 준다. 이제 형이 아닌 사람과 연애하는 나를 상상하면 진저리가 쳐진다. 가정으로라도 생각하기 싫다. 
/ 12-2 ‘마지막으로’ 중

 

 뉴욕의 혼인신고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고, 옆에 있는 방으로 가서 서약식을 진행하면 관광객 비자를 가진 사람도 24시간 안에 부부가 될 수 있다. 이를 노린 우성은 당장 명헌을 미국으로 불렀고, 그와 동일한 마음이었던 명헌도 하루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정말 빠르고, 쉽게. 별 일 아니라는 듯 194만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라이브 방송에서의 실시간 커밍아웃도 하기 전에만 무서웠지 막상 하고 나니 별 일도 아니었다. 여러 유명 인사들이 정우성과 이명헌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사람들은 동성혼 하면 가장 먼저 둘을 떠올리게 됐다.

 혐오 단체의 타격이 된 우성은 결혼 초기 장기간 이어진 스토킹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더 많은 진보가 필요했던 한국에서 활동하는 명헌은 누군가로 인해 몇 번씩 경기 주전으로 뛰지 못했다. 참지 못한 명헌이 증거를 모아 이를 폭로했고, 농구협회 회장이 대국민 사과 후 사퇴했던가. 큰 파도가 몇 차례 육지를 뒤덮었지만 결론적으로 세상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구에는 해와 달이 뜨고, 정우성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되었고. 이명헌은 농구 커뮤니티에서 감독 감으로 거론될 만큼 여전히 국내 최고 포인트가드의 자리를 지켰다.

 서로와 함께라면 잠깐의 봄바람에도 심장이 뛰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우성과 명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을 할 테다. 중간까지 문서를 계속 읽어 나가던 우성의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창을 닫았다.

‘처음 보는 것처럼 리액션하면 아무것도 모르겠지용.’

 

 

봄은 절대 아니지만, 완전한 여름이라 부르기에는 쌀쌀한 바람이 부는 6월 3일. 오전 6시가 되면 농구 국가대표팀의 하루는 조금 특별하게 시작된다.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의 데뷔곡이 선수촌 전체를 울리면 다양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숙소 밖으로 뛰어 나온다. 새벽 훈련을 가장한 고문이 끝나면 유일하게 고등학생 시절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선물로 준비해 둔 편지 뭉치가 떠올라 가볍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두 사람의 7번째 결혼 기념일이니까. 

🎧 오디오를 틀어주세요

Bride of Jun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