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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 비오니

w. 파도에

@PADO__e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시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산등성이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검은 나무 그림자가 내려앉아 사위는 태양이 저문 것처럼 어둡기만 하다. 남자는 재단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허공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버썩 마른 듯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진다. 

 

신이시여

절망이 있다면 제게 모두 주시고

제가 지은 죄만큼,

그보다 더 그가 안온하게 해주십시오

부디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도록……

 

 

 

 

 

 

 --· 

 

 

 

 

 

 

우성은 억눌린 숨을 뱉으며 번쩍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 사이로 남자가 분명히 자신을 바라봤던 탓이다. 남자는 기도 끝에 고개를 들어 우성을 바라보았고, 때마침 바람이 불어 그림자가 흔들렸다. 흐린 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췄고 우성은 그를 마주봤다. 죽은 짐승처럼 빛 바랜 눈은 이게 꿈이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저 너머의 우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좀전까지만 해도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있었으면서도,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어…?”

 

땀에 달라붙은 잠옷을 펄럭이며 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밤에 떠다 둔 물 한 컵을 비웠다. 묘한 기시감 때문인지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을 잊기 어려웠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머리로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우성은 착실히 옷을 갈아입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꿈이야 뭐가 어찌 됐건 꿈일 뿐이고, 광철이 출근하기 전 한정된 시간 안에 오늘 치 농구 한 판을 해야 했으니까. 

 

…잠깐, 

 

“잘 잤어 우리 아들?”

 

광철?

 

농구 골대 밑에서 공을 퉁퉁 튕기던 광철이 우성을 돌아본 순간, 우성은 알 수 있었다. 꿈 속에 나온 그 남자는 광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익숙할 리가? 수염 없고 머리 짧은 광철은 그렇게 생긴 걸까? 엉킨 실타래가 한 순간 풀리는 듯한 기분에 우성의 낯이 환하게 펴졌다.

 

“광철, 어제 내 꿈에 왜 왔어?”

 

오늘부로 중학생이 되는 청소년 치곤 꽤 깜찍한 화법이었다. 광철은 잠깐 벙졌다가, 곧 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제 아빠 꿈을 꿨어?” 

 

예고도 없이 공이 휙 날아왔고 우성은 자연스럽게 공을 넘겨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끝에서 일정한 속도로 농구공이 튀어올랐다. “무슨 꿈이었는데?” 광철이 물었고, 우성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오물거리며 하프라인 밖으로 빠져나가 슛을 쏴 올렸다.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림을 맞고 튕겨나왔다. 엑. 대답 대신 탄식이 흘러나왔다. 

 

“욕심 내면 안 되지.”

“얼마 전에 키가 더 컸으니까 될 줄 알았어.”

 

팔도 더 길어졌으니까 왠지 될 것 같았는데. 생각하며 우성은 공을 든 광철의 앞으로 바짝 붙어섰다. 한창 성장기라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쑥쑥 크고 있어서 이젠 광철과 1 on 1을 해도 체격적으로 엄청나게 불리하진 않았다. 부쩍 길어진 팔다리가 쑥쑥 튀어나와 공을 가로채려 해서, 광철은 요즈음 아침마다 진땀을 빼야 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말 안 해줄 거야?”

 

어느새 공이 우성에게로 넘어가고, 골대를 향해 달려드는 아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광철이 물었다. 우성은 광철의 손을 피해 옆으로 비껴나가며 슛을 쏴올렸다. 철썩- 시원한 파도 소리가 울렸다.

 

“기도했어. 광철이. 재단 같은 데서.”

“기도?”

“응. 머리 짧은 광철이. 신한테 막 빌었어.”

 

그물을 빠져나온 공은 곧바로 광철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아들이 가져간 2점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재빠르게 움직여 광철은 3점슛 라인 밖으로 나가 섰다. 우성이 그 앞을 가로막으려 점프했지만 공은 우성의 손끝보다 위로 날아올랐다. 또다시 시원한 물 소리가. 

이익! 우성은 분한 듯 짧게 발을 구르면서도 곧바로 달려나가 떨어진 공을 붙잡았다. 

 

“아들 꿈에까지 가서는. 뭐라고 기도했을까, 내가?” 

 

우성의 드리블을 깨고 공을 가로채며 광철은 혼잣말처럼 물었다. 우성은 곧바로 꿈 속의 기도를 떠올렸지만,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대답하기를 관뒀다. 시야 끝에 남자의 암울한 얼굴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우성의 침묵을, 잊어버렸다거나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한 광철은 “우리 아들 행복하라고 기도했겠지.” 말했다. 광철의 손 끝을 떠난 공이 다시금 그물을 스쳐 떨어지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나 농구 잘 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고?”

“하하. 원래 간절하게 기도할 때가 되면 그런 생각은 안 나. 그럴 땐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란다거나 건강하길 바란다고 비는 거지. 그걸 가장 원하고 바라니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광철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농구는 스스로 노력해서 잘 해야지. 기도로 넙죽 받아먹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그건 나도 알거든?”

 

왠지 모를 부끄러운 기분에 우성은 괜히 툴툴거렸다. 하얀 뺨이 열기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이유로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며, 광철은 씩 웃었다. 혼자 낳은 것처럼 저를 쏙 빼닮은 아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우성이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까지 흐뭇하게 지켜보던 광철은 문득 다른 생각을 했다.

 

“꿈에 나온 게 내가 아니라 어른 된 우성이일 수도 있는 거 아냐? 우성인 아빠랑 꼭 닮았으니까.”

“나?”

“난 젊었을 때부터 늘 머리가 길었었거든.”

“그래?”

 

우성은 그늘진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광철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과 좀 닮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곳까지 가서 남을 위해 기도할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얼굴을 할 일도 없을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얼른 씻고 출근해야지. 우성이 너도 오늘 첫 날인데 지각하면 안 되잖아.”

“저녁에 또 해!”

“그래, 그래.”

 

그냥 개꿈이겠지. 닮은 사람이겠지. 생각하며 우성은 마지막 슛을 쏘아올렸다. 또다시 하프라인 바깥까지 밀고 나와, 팔을 곧게 뻗은 채로 과감하게 던졌다. 들어간다! 직감함과 동시에 림과 공이 부딪히는 소리, 그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성은 양 볼이 동그랗게 부풀도록 환히 웃었다. 남자의 잔상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맑은 행복이었다.

 

 

 

 

 

 

 · 

 

 

 

 

 

 

일주일 즈음 지나,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일랑 도려낸 듯이 지워버린 우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우성의 꿈 속에 침범했다. 그때와는 달리 키가 두세 뼘 정도 작은 우성 또래의 모습이었지만 우성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 질린 듯한 무미건조한 눈이 더 볼 것도 없이 그 남자의 것이었으니까. 

 

 

 

우성은 근처의 나무 내지는 벽 한 켠에 걸린 그림 정도나 되는 시선으로 남자의 삶을 봤다. 고급스러운 셔츠에 잘 다려진 바지를 입고, 으리으리한 석조 저택에 살면서도 남자는 늘 권태로워 보였다. 며칠 동안이나 이어지는 꿈 속에서 남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릴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석조 저택과 정원 밖을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탈이라곤 나무 밑둥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거나, 나이 터울이 큰 여동생을 어르고 달래 웃게 하는 것 뿐이었다. 

 

여동생이 그의 품 안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도 그 소리는 우성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가 저택 안에 있을 때면 바람 소리가 들렸고, 정원 끄트머리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데도 남자는 한 번도 물을 보러 가지 않았다. 철창 안에 갇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저택 주변을 맴맴 돌았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우성은 그를 보며 한 번은 ‘저긴 농구가 없나?’ 생각했고, 널따란 마당을 보며 ‘저기 농구 골대를 세우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골대가 서는 일은 없었다. 검은 마차 한 대가 불쑥 찾아와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

 

비를 흠뻑 맞은 말은 연신 코를 움찔거렸고, 말발굽 무늬는 진흙 위에 깊은 상흔처럼 남았다가도 비에 쓸려 사라졌다. 마차에서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내렸고 남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공손하게, 하지만 두려운 듯이. 남자는 여동생을 등 뒤에 숨긴 채 몇 발짝 물러서 있었다. 방문객은 모자와 자켓을 벗어 하인들에게 건네며 스쳐가듯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등 뒤에 숨긴 동생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방문객은 남자의 부모에게 무어라 말하며 남자와 동생 쪽으로 넌지시 눈을 흘겼다. 아버지의 턱에 힘이 들어갔고, 어머니의 낯은 창백해졌다. 그들의 긴장을 모르는 체 하며 방문객은 하인 한 명을 향해 손짓했다. 하인은 부리나케 달려나가 마차에서 짐꾸러미를 꺼내 왔다. 그 잠깐 사이 하인은 비에 쫄딱 젖었지만 그가 든 물건만큼은 온전했다. 하인은 들고 온 물건을 남자에게 건넸다. 곱게 포장된 상자에는 예쁜 유리 인형이, 가죽 케이스 안에는 엽총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방문객은 남자의 부모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며, 남자를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응접실 문이 닫히자마자 남자는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굳게 닫고 동생을 놀아주는 데만 집중하려 애썼다. 시야 끝에 걸리는 가죽 케이스는 침대 아래에 깊이 숨겨두고. 그의 동생은 선물 받은 유리 인형을 꺼내 놀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그는 동생을 애둘러 달랬다. 원래 가지고 있던 솜인형을 꺼내 쥐여주고 품에 안고 업어주고 하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 동생은 잠들었고, 남자는 빗소리 사이로 말 우는 소리를 들었다.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 방문객이 어서 떠나기를 기다리는데, 하인에게서 모자를 건네 받고 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던 사내가 돌연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깜짝 놀라 창틀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다음 날 꿈에서, 방문객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그 사이 시간이 꽤 흘렀던 듯 동생의 머리칼이 어깨에서 가슴까지 길어져 있었다. 

 

방문객은 남자의 등 뒤에 숨듯 서 있는 동생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동생은 응? 하고 되묻는 듯한 표정을 하고 방문객을 올려다보았고, 남자는 동생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오래 머무를 생각 따윈 없었던 것처럼, 방문객은 아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저택에 걸음하지 않았다. 

옅게 일렁거리는 모래 바람을 맞으며 가족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어른을 바라보며, 어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나가는 사신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폈다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버지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입을 뻐끔거렸다. 우성은 그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그 다음 꿈은 남자가 침대 밑에서 가죽 케이스를 꺼내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 안에서 엽총을 꺼내 든 남자는 몇 번 총 여기저기를 만져보더니, 그대로 어깨에 총을 매고 집 밖을 나섰다. 

그간 우성이 보아왔던 남자의 영역 밖을 벗어나는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초행길인 듯 울창한 숲 속을 몇 번인가 헤매던 남자는 어느 가파른 절벽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췄다. 우성에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남자는 나무 밑둥이 아닌, 절벽 끄트머리에 선 채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절벽 위에서 보는 하늘과 바다는 면과 면이 맞닿아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하늘 나는 새가 바다를 헤엄치는 것만 같고, 튀어오르는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바다 내음을 맡으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거품이 크게 일렁이며 남자가 선 벼랑 아래를 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남자는 어깨에 걸어 둔 총을 내렸다. 개머리를 어깨와 뺨 사이에 붙이고, 양 손으로 총을 단단히 고정했다. 장전했으나 조준하지 않은 채로 남자는 하릴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파도 위로는 갈매기 떼가 낮게 날고 있었고, 저 높은 곳에서는 다른 새들이 떠돌듯 유영하고 있었다. 남자는 펄럭이는 날갯짓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총은 한 번 쥐어보기만 했다는 것처럼. 

 

남자의 발 밑으로 다시 한 번 크게 파도가 휘몰아쳤고, 낮게 날던 갈매기가 위로 날아오르며 크게 울었다. 바람이 불어 등 뒤의 나무가 흔들렸고, 숨어 있던 산새 한 마리가 남자의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벼랑을 딛고 날갯짓하듯 날아오르는 뒷모습에 대고 남자는 첫 발을 쏘았다. 자연이 주는 소리 외에, 우성이 듣게 된 최초의 소음이었다. 

 

탕!

굉음과 함께 출렁거리며 수면이 요동쳤다. 움직임을 잃은 새는 가라앉았다가 금새 다시 떠올랐다. 남자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맞붙여 기도했다.

 

남자는 총을 챙겨 저택으로 내려왔다. 발걸음을 따라 풀 밟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택에 가까워지자 인기척 소리가 들렸고, 남자는 마당 앞에서 사색이 된 어머니를 마주했다. 파랗게 질린 어미는 한 달음에 달려와 비명처럼 아들을 불렀다. 

 

- 우성아!

 

 

 

 

 

 

 ···- 

 

 

 

 

 

 

우성은 꿈 속의 어미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깨어났다. 분명 그녀는 남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렀다. 확실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우성은 인정할 수 있었다. 꿈 속에서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그게 전생인지 환상인지는 알 수 없어도. 

 

우성은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동네 한 바퀴를 달렸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돌아와 씻기 전 거울을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무표정한 얼굴을 해봤다. 이목구비는 틀에 찍은 듯 같았지만 표정만큼은 따라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지루해 죽겠다는 버썩 마른 그 얼굴을 흉내내기엔 우성은 너무나도 삶이 즐거웠으니까. 

 

 

 

중학교에 진학하자 우성의 세상은 크게 넓어졌다. 최고 학년에서 최저 학년이 된 것도, 저마다 다른 성장기 탓에 키가 들쭉날쭉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뛰는 것도 재미있었다. 동갑내기 사이에서는 키가 훌쩍 큰 축에 속하는 우성은, 적어도 2학년들과는 붙어야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았다. 제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선배들을 볼 때면 우성의 눈은 반짝 빛났다. 

우성은 한 달 만에 농구부 주전이 됐고, 저보다 키가 한두 뼘은 큰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당연한 일을 왜 부러워하는지 우성은 이해조차 못 했지만. 열심히 하면 잘 하게 될 건데 부러워 할 시간에 연습하면 되지 않나?), 선배들에게서는 귀여움을 받았다. 

농구는 원래 재미 있고, 잘 하니 칭찬 받고, 기분이 좋아지면 농구가 더 잘 되고 그러면 더 재밌어지고. 요즈음 우성은 매일매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빨리 잠을 자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농구하러 학교에 가고 싶었다. 저와 똑 닮은 얼굴로 절망 속에 사는 남자를 만나는 꿈은 즐거운 내일을 향한 관문 같은 거라고 느껴졌다. 

 

 

 

 

 

 

 · 

 

 

 

 

 

 

총성 이후 ‘우성’은 아버지께 크게 혼이 났다. 따끔하게 아들을 훈육한 뒤, 우성에게서 총을 건네 받아 케이스 안에 도로 집어넣으려던 아버지는 제 눈을 의심하듯 멈칫했다. 케이스 안은 총과 함께 총알이 딱 네 발 들어가도록 짜여 있었고, 우성이 한 발을 소모한 탓에 세 발만 남아 있었다. 

 

“이게……” 

 

운을 떼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아버지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입을 꽉 다물고는 케이스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리고 총을 챙겨 방을 나갔다. 덜 닫힌 문틈 사이로 묵직한 걸음 소리가 쿵쿵 울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우성은 눈치 보듯 장롱 옆에 잠자코 서 있는 동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가 빵야 했어? 왜?”

“새를 잡으려고.”

“왜?”

“속죄를 하려거든 제물이 있어야 하니까.”

 

속죄? 제물?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름대로 뜻을 유추해보려고 애썼다. 왜? 뭐야? 하고 계속 묻기만 해도 우성이 친절히 답해줄 걸 알지만, 제 힘으로 정답을 맞춰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을 하면 오빠 기분이 나아지겠지?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하는 게 눈에 보여서, 우성은 미소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하는데, 그때 기도를 더 잘 들어 달라고 뭔가 바치는 거야.”

 

아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쯤 벌어진 입이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음을 표했지만, 아이에게 지금 더 궁금한 건 자신이 이해할 만큼 명쾌한 뜻 같은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

 

“뭘 용서해달라고 빌었는데?”

“…….”

 

우성은 대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내 자식까지 이런 무게를 짊어지게 할 순 없어!’ 외치던 아버지의 절규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우성 자신도 이 꼬마 숙녀가 어둠 따위는 일절 모른 채 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동화에서처럼… 공주님께 사과를 준 거야.”

“공주님이 사과 때문에 잠들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응. 잠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데, 만날 수 없으니까 신께 대신 비는 거야.”

 

우성은 답을 해놓고도 내심 긴장했다. 만날 수 없는데 어떻게 사과를 줬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늘 그래왔듯이, 더 어려운 물음만을 내어놓았다. 

 

“근데 공주님은 잠들고 나면 왕자님을 만나게 되니까 좋은 거 아냐?”

 

아이는 되려 오빠가 사과를 준 덕에 공주님이 왕자님을 만나 사랑을 할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별을 떼다 박은 듯 두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우성은 ‘공주님은 왕자를 만나지 않더라도 잠들지 않기를 원했을 수도 있잖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아이의 또 어떤 말이 자길 당혹스럽게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성은 며칠 전 사용인이 새로 만들었다던 인형 옷 얘기를 꺼내 아이의 정신을 쏙 빼놓기로 결심했다.

 

오빠가 그걸 물어봐주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조잘조잘 인형 옷 얘기를 꺼내는 아이를 덥썩 안아올려 동생 방으로 건너가면서, 우성은 생각했다. 거짓말이 쌓이고 쌓여 키처럼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자신이 하루하루 커가며 부모님이 숨기려 했던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아이도 제가 한 거짓말을 알아채는 날이 오겠지? 생각했다. 그럼 그 때는 공주가 아니라 왕자였다는 것도 알게 되겠구나.

 

 

 

 

 

 

 -·- 

 

 

 

 

 

 

우성은 벤치 멤버로 첫 중학 전국체전에 나섰다. 스타팅으로 뛰고 있는 선배들 중 누군가 파울로 아웃당하거나 다치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성은 제게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뛸 때의 그림을 상상하느라 응원 박자도 종종 놓치기 일쑤였다.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코트 위를 바라보고 있는 우성을, 감독은 이따금 빤히 바라보았다. 

 

우성이 딱히 기도한 적은 없었지만 신이 우성의 바람을 이뤄주기라도 한 건지 3학년 한 명이 벤치로 불려나왔다. 감독이 타임아웃을 청했고, 벤치 멤버들은 우르르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땀범벅이 된 주전들이 벤치에 앉아 감독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성은 등 뒤로 주먹을 쥔 채 서서 감독의 손에 들린 화이트보드를 훔쳐보았다. 

5번이 돌파를 해야 하는데. 감독님이 그 얘길 할까? 나라면 무리하게 부딪히려고 하지 않고 공을 돌렸다가 다시 가겠어. 저쪽 센터는 고등학생만큼 체격이 좋으니까, 차라리 몸을 낮게 숙이고 다리 사이로 드리블을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아, 나라면-

 

“정우성!”

 

생각에 잠겼던 우성은 누군가 제 팔을 팍 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감독부터 주전, 벤치멤버들 모두가 우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옆에 선 2학년이 나무라듯 속삭였다. 감독이 화이트보드에 우성의 등번호 23이 적힌 자석을 붙이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정우성.”

“네!”

 

우성은 설마, 하는 기대와 함께 눈을 반짝였다. 감독은 상대편 코드 오른쪽에 23번 자석을 붙이고, 벤치에 앉아 있던 3학년 종규를 바라보았다. 감독의 손에서 종규의 5번 자석이 떨어져 나왔다.

 

“우성이가 종규 대신 들어간다. 우성이 너는-”

 

감독은 전술 설명을 이어나갔지만 그건 우성의 한쪽 귀로 금방 흘러나갔다. 우성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끼며 화이트보드 위 23번 자석만을 바라봤다. 두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1학년인데 첫 경기에 바로 출전? 벤치 멤버들은 우성이 크게 긴장할까 염려하다가도, 동그란 눈이 설렘으로 반짝이는 걸 보곤 마음을 놓았다. 

몇몇은 후배에게 밀려난 종규의 자존심이 상했을까봐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종규는 머리에 둘러 썼던 수건을 내리고, 우성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며 “잘 해라, 정우성. 부탁한다.” 할 뿐이었다. 우성은 쾌활한 표정으로 코트를 향해 뛰어나가며 “우리가 이길 거예요.” 외쳤다.

 

 

 

그리고 우성의 말은 현실이 됐다. 우성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대로 저보다 20cm는 큰 상대팀 센터를 드리블로 돌파해 점수를 따냈다. 어느새부턴가 포인트가드 민철은 우성에게 공을 돌리는 일이 잦아졌다. 우성은 화답하듯 골을 넣어 주었고, 그럴수록 우성에게 가는 공이 점점 더 많아졌다. 감독은 벤치에 앉아 우성의 활약을 지켜보았고, 종규는 그런 감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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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떠나 수도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우성’을 둘러싼 환경은 모든 게 다 바뀌었다. 동화에서 나올 것만 같은 하얀 저택이 이제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정원에는 분수 같은 건 없어도 일정한 길이로 깎인 잔디가 늘 싱그럽게 반짝였고 한 켠에서는 어머니를 위한 꽃이 사시사철 향기를 풍겼다.

가족을 감시하듯 삭막했던 고용인들은 사라지고 늘 웃음으로 시중드는 사람들이 복도를 꽉 채웠다. 로비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는 영롱하게 빛나며 온 집안을 밝혔다. 샹들리에는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우성은 늘 그게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떨어질 거라고.

 

시간이 지나고 우성의 키가 자라 샹들리에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미묘하게 흔들거리는 샹들리에가 꼭 제 가족을 상징하는 것만 같아서 우성은 늘 과거의 푸르른 정경을 그리워했다. 선조 때부터 쌓아온 업보가 있는 원죄의 성이라지만 그게 더 나았다.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누가 가문으로부터 독을 가져가 다른 누구를 해하며 부를 쌓았을지 가늠하는 것보다는. 앞에서는 아첨하는 이들이 뒤에서는 더러운 족속이라 매도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보다는, 절벽 위에 서서 온종일 바람을 맞는 게 더 나았단 말이다. 

 

 

 

그러나 이 곳에 와 말을 타게 된 것 만큼은 좋아했다. 우성이 열 다섯이 되던 해, 아버지는 망아지 두 마리를 사들였다. 우성은 새끼에게 직접 우유를 가져다 먹이고 갈퀴를 빗어가며 사랑을 주었다. 망아지들은 자잘한 병치레 하나 없이 무럭무럭 자랐고, 윤기나는 털을 자랑하는 명마가 되었다. 

 

우성은 날이 맑을 때면 둘 중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와 들판을 달렸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시리게 느껴질 만큼 달리다가, 저택에서 훌쩍 멀리 떨어져 나왔을 때면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 해가 지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느리게 되돌아왔다. 그게 우성의 유일한 낙이자 도피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부턴가 달아나고픈 순간이 되면 우성은 무의식적으로 말의 목울대를 때리듯 손을 툭툭 치거나 왼발 뒤꿈치를 바닥에 쿵 누르곤 했다. 향수 냄새 자욱한 연회장 한 가운데 있노라 하면 행동은 더 잦고 거세졌다. 오늘도 우성은 기둥에 기대어 서서 구두굽으로 바닥을 쿵, 쿵 찍어누르는 중이었다. 불규칙적인 그 소리는 경고음처럼 들리기도 해서, 말을 붙여보려던 이들은 우성이 발을 구를 때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게 됐다.

 

아가씨들, 가까이 갈 생각일랑 마세요. 피 대신 독이 흐른다는 말이 있던데, 가까이 갔다가 화라도 입으면 어쩌시려고? 

독은 몰라도 저 얼굴엔 중독될 수 있을지도요.

쯧. 하룻밤 유희라면 몰라도 낯짝만 뜯어먹고 살 순 없는 법이지.

영지는 작아도 꽤 볼만 하다던 걸요.

가 본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거긴 금지된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머, 듣기로는 그렇다던데. 그런데 왜 금지됐단 말이예요?

아가씨, 모르십니까? 수십 년 전 반역을—

 

무겁게 짓눌리는 경고음 사이로 쑥덕거리는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우성은 소리의 근원지에 한 번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다시 눈을 돌렸다. 

 

 

 

시답잖은 소리나 듣고 있을 바에야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도는 게 낫겠군.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우성은 백발의 노인이 장정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죽거리는 남자들 사이에 선 노인은 모멸감조차 잊은 듯 차분하게 보였다. 

뭉그러진 목소리 속에서 징집… 자식… 직접…… 같은 낱말들이 들려왔다. 우성은 발소리를 죽인 채 점점 거리를 좁혔다. 형태가 잡히듯 소리가 선명해짐과 동시에 눈코입이 또렷해졌다. 우성은 노인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젠 죽어 사라진 왕비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누군가가 우성을 돌아보고는 이죽 웃었다. 보란 듯 옆에 선 사내의 팔뚝을 툭 건드려 우성의 존재를 눈치채게 하기도 했다. 반역자의 핏줄과 몰락한 외척이라니 호사가들이 보기에 이것만큼 좋은 그림이 없었다. 그들은 우성의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러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국가를 위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 그럴 듯한 말이었지만 실상 속내는 그랬다. 자식이라곤 여식 하나 뿐이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른 작자들처럼 숨겨둔 사생아를 가문의 이름으로 내보내는 일조차 무용할 테니 그렇다면 자처해서라도— 하는 권유이자 협박이었다. 

 

우성은 한 걸음 뒤에 서서 방관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우성이 그랬듯 그도 우성을 한 눈에 알아본 듯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지겹도록 이어지는 참전이니 의무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성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땅과, 낭자한 선혈, 죽음의 냄새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사활을 걸어 키워낸 작물을 먹고 잠자듯 바닥에 드러누운 산짐승 같은……. 

남아있던 한 걸음이 좁혀졌고, 주름진 눈이 발 끝에서부터 올라와 얼굴에까지 닿았다. 우성은 그 눈을 마주하며, 한 발의 총성과 낙하하는 속죄양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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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경기 이후 종규는 종종 우성과 차례가 바뀌게 되었다. 무려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키는 한 뼘이나 작은 우성에게 스타팅 자리를 빼앗겼다 해도 종규는 우성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따금 자존심이 상해 벤치에서 씨근덕거릴 때도 있긴 했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현명한 어른의 중재는 아이들의 혼란을 잠재우는 법. 감독은 종규와 우성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주전 전체와 우성을 교체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루는 종규, 그 다음엔 덕수, 또 어느 날에는 재준을 대신해 우성은 뛰었다. 두 달 즈음 지나자 농구부는 우성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내 자리나 내 친구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함께 뛰면 더 잘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고, 어느덧 시시할 정도의 승리를 맛보게 해주었으니.

 

경기 경험이 쌓일수록 우성은 더 잘하게 됐고 더 즐거워졌고 그래서 더 잘하게 됐다. 우성이 뛰면 이길 수 있었으니 직설적인 화법도 너그러이 받아들여졌다. 되바라지고 건방진 구석이 있다던 초반의 평가는 눈 녹듯 사라지고 우성은 선배들에게 예쁨만 받았다. “저한테 공 주세요!” 외쳐도 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골을 넣고 활짝 웃는 얼굴은 누가 봐도 어린 태가 나서, 한두 살 차이에도 민감하게 굴기 마련인 중학생들의 마음을 말랑해지게 만들었다. 자리를 뺏겼다고 한두 살‘이나’ 어린 애를 괴롭히는 건 쪽팔린 짓이지, 하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우성을 그저 귀여워하고 예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룰은 동급생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우성은 날이 갈수록 저를 둘러싼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잘한다 잘한다 해주던 3학년들이 사라지고, 2학년이 된 우성은 한 학년 위 선배들과도 그런대로 잘 지냈다. 그들도 예전 3학년 못잖게 한 살 어린 우성을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그건 선배의 덕목 같은 거니까. 

 

하지만 동갑내기가 -좋게 말하면 솔직하게 나쁘게 말하면 건방진- 우성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좋은 뜻으로 말한다고 좋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우성은, 1학년 때부터 자기들과 급이 다른 사람이라는 듯 굴면서 빈 말로도 겸손하지 않고 그저 떳떳이 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고깝게 보이는 놈이었다. 

이미 마음 속에서 재수 없는 놈이라고 낙인 찍은 사람이 제게 조언을 한다고 그게 좋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좋게 말해도 날이 선 반응만이 돌아왔고, 유독 제게만 예민하게 구는 동갑내기들을 우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함께 뛰며 손발을 맞추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선배들도 처음부터 날 예뻐하진 않았지만 점점 괜찮아졌잖아.

생각하며 우성은 선배들의 빈자리를 채운 동급생들과 어떻게든 한 팀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농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니까. 그래서 더 가감없이 조언하고 때로는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래서 잘 하게 되면, 농구가 점점 더 재밌어지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호의를 시비라고 받아들일 줄 우성은 짐작조차 못했다. 어느 날, 연습 경기 중 상대 코트로 뛰어나가며 우성은 제게 패스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공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고 득점하지 못한 채 상대편으로 흘러갔다. 잠시 뒤 우성은 다시 한 번 “패스!” 외쳤다. 그러나 또다시 공은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우성은 혼란에 빠졌으나 실수였겠지, 넘어가려 했다. 

난데없이 공이 날아와 제 어깨와 팔을 치고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패스해달라며?”

 

여기저기서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학년 아래 후배들은 눈치 보듯 체육관 벽에 붙어 서 있었고, 상대편으로 있던 한 학년 위 선배들은 방관하듯 후배들을 바라보았다. 우성의 기분을 살피는 듯 하긴 했지만 후배들의 일에 직접적으로 끼어드는 것까지는 귀찮은 눈치였다. 

우성은 수십 개의 눈알들 속에 홀로 동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가 잘못 됐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공이 치고 지나간 팔뚝이 욱씬거리며 아파왔다. 우성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음부턴 패스 똑바로 해.” 

 

했다. 공을 던진 아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감정 없이 한 말이 다른 아이들의 감정을 끓게 만들었다. 

그 날 오후 농구부 연습이 끝나고 동급생들은 우성을 불러 세워 체육관 뒤로 데려갔다. 몇 명의 아이들과 벽 사이에 갇혀 우성은 난생 처음으로 적의라는 걸 느꼈다. 얼굴이 돌아감과 동시에 눈 앞이 번쩍거렸고, 빛이 사그라드는 순간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우성은 얼이 빠진 채 제 앞에 선 동급생들을 바라보았다. 이겨내겠다는 의욕도 일지 않고, 뚫어낼 수 있다는 고양감조차 일지 않는 최초의 시련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우성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잠든 것만 같이 느껴졌다. 거울 위로 비치는 얼굴이 내 것인지 혹은 다른 사람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와 그는 다른 사람이라고 못 박아 믿어온 게 무용하게 느껴질 만큼, 우성은 꿈 속의 그를 닮아 있었다. 내일 당장 죽는데도 상관 없다는 듯 초연한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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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와의 국경지대 소유권 분쟁 속에 떨어진 ‘우성’은 그런대로 잘 살아남았다. 크게 다친다면 그건 벌일 테고, 죽는다면 속죄가 되겠거니 하는 탈력감만 가지고서도 살아남았다. 죽어도 상관 없다 하는 사람은 크게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데, 승전 후 가족들의 품으로 반드시 돌아가리라 하는 사람들은 꼭 죽어나가는 기현상이 팽배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하던 우스갯소리를 입증이나 하는 것처럼 그랬다.

신은 내면의 기저에 깔린 본심을 너무나 잘 읽어서, 살고자 하는 열망은 앗아가고 목적을 잃어버린 무력함은 못 본 체 하곤 했다. 전우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리라, 반드시 무사 귀환하리라’ 말해도 우성은 결코 죽지도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같은 날, 고향으로 돌아가면 받은 돈으로 어머니 약값을 대겠다며 웃던 전우가 며칠 뒤 죽은 채 돌아오는 것을 보며 우성은,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마음보다도 이 무료하고 괴로운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고픈 욕망이 더 크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서 기어이 돌아가게 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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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틈 사이로 절망은 거듭 흘러나왔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젠틀한 척 하며 어깨나 툭툭 치고 지나가곤 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동급생의 폭력은 무자비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우성을 끌어내려 같은 선에 서고 싶어 했다. 발 아래 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듯 굴었다. 그래서 우성을 마구잡이로 붙들고 때리고 밀어붙였다.

 

꺾이지 않는 우성은 눈엣가시이자 은근한 공포였다. 그 애들은 체육관 밖에선 우성을 치고 밀치고 조롱하다가도, 코트 위에서는 우성을 살뜰히 이용했다. 재수 없고 거슬리지만, 우성에게 공을 주면 이길 수 있었다. 그게 내가 만든 건 아니라도 어쨌든 나의 승리가 되긴 했다. 우성은 기뻐하는 부원들 사이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발 뒤꿈치를 쿵, 쿵 눌렀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짓도 다 끝이야. 농구 명문이라는 그 고등학교에 가고 나면…… 아주 멀리 가면…….

아주 멀리 떨어진 그, 어느 공업 고등학교의 농구부 팜플렛을 보며 우성은 가장 먼저, ‘여기서도 반복되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고교 진학 후의 달라질 제 농구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저를 내려다보던 검은 눈빛들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지겨워…….”

 

비로소 우성이 꿈 속의 그와 같이 매일을 지겨워 하게 되었을 때, 꿈 속의 그는 웃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 누군가 나타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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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은 승전가와 함께 돌아왔다. 오른팔에는 붕대를 감고, 왼손에는 전우의 유품을 들고. 눈물로 맞이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우성은 수도를 벗어나 산으로 되돌아왔다. 등 뒤로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바람 소리가 몸을 감싸는, 지긋지긋하며 동시에 그리운 고향으로. 

 

저택으로 곧장 가지 않고 수풀 속으로 발을 돌린 우성은 품 속에서 작은 목걸이를 꺼냈다. 조금은 마음을 터놓았던 전우의 유품이었다. 꼭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결심했지만 그리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유품이라도 고향에 묻어주자, 했다. 종전이 선언되자마자 유품을 주머니에 넣고 그의 고향으로 가려던 우성은, 그제야 그가 석조저택 아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동향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어쩌면 돌아가는 사람이 그가 될 수도 있었는데.

 

우성은 나무 아래를 거닐며 볕이 잘 드는 땅을 찾아 헤맸다. 저마다 경쟁하듯 키가 크고 가지가 높이 뻗은 탓에 바닥으로는 볕이 잘 들지 않아 우성은 자리 선정에 애를 먹었다. 조금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던 중,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빛줄기를 보았다.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빛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 아래 누군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보았다. 햇빛이 그를 콕 집어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수풀을 해치고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맨 손으로 무언갈 파묻고 있었던 듯, 양 손이 온통 흙투성이인 데다 손 끝에서는 옅게 피가 비쳤다. 흙을 팠다가 묻은 듯한 자국을 보자마자 우성은 그게 무덤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 삽 같은 걸로 하십시오. 손을 갈아 넣을 게 아니라면.

 

소리를 내자 그제야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우성을 바라보았다. 볕이 내리쬐는 하얀 얼굴이 반짝이는 듯 보였다.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우성은 그를 알 수 있었다. 

 

- 묻을 게 없을 텐데 뭘 묻었습니까? 유품은 내게 있는데.

- …내가 누굴 묻는 줄 알고 뿅?

 

뿅?

잘못 들은 건지 의심되는 한 구절을 되짚으며, 우성은 손을 펼쳐 목걸이를 내보였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줄이 길게 늘어졌다. 그늘 아래서도 반짝이는 팬던트를 그는 알아본 듯 했다.

 

- 역시 죽었구나.

 

땅까지 파헤쳤던 주제에 남자는 그제야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굴었다. 밀려드는 슬픔으로 볕 아래서도 눈이 까맣게 죽어가는 게 보였다. 

 

우성은 그걸 보며, 하나도 안 닮았는데 생각했다. 가엾어 늘 마음 쓰던 전우의 그 동생이라기엔 닮은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 아니라, 차라리 연인이었다면 믿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당신입니까? 가족이라기엔 닮진 않은 것 같아서.

- 그런 말 많이 들어, 뿅.

 

그는 실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눈이 검게 가라앉도록 침잠했던 슬픔을 그새 갈무리한 듯,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을 털고 일어나 불쑥 거리를 좁혔다. 우성의 손가락 끝에 걸린 목걸이를 가로채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흙을 다시 걷어내고 그 안에 목걸이를 깊이 파 묻기 시작했다. 

 

그 일련의 행위가 너무도 거침 없어서, 우성은 손을 다칠 거라고 경고했던 최초의 순간조차 잊어버렸다. 그저 가만히 서서 그가 땅을 다시 파내고 흙을 다시 덮어 평평하게 만드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아,” 하고 탄식하는 순간에야 정신을 차렸다. 흙 묻은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빨갛게 피가 비쳤다. 

 

- 그러게 내가,

 

하며 우성이 상처를 닦을 만한 게 있는지 바지 주머니를 뒤지던 때였다. 

통증이 있는지 상처 주변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흙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덤을 마저 완성했다. 우성은 바지 주머니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건네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왠지 머쓱한 기분에, 주머니 속에 손을 숨긴 채 우성은 전장에서 많이 쓰던 신호로 그를 핀잔했다. 

·-- · ·-- ·- ·-·· · --·· ·-·· ··- ··-· 

 

그리고 그는 그런 우성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냐, 뿅.” 묻기도 했다. 

우성은 “뭐가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 제법 순진무구해 보였다. 

 

- 그게 신호란 건 알아.

- 그럼 맞춰봐요.

- …….

 

그는 도톰한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간 말 없이 생각에 잠긴 듯 우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홱 돌아섰다. 더 이상 용건은 없다는 듯 꽤 매정한 태도였다. 

 

- 유품을 전해준 건 고마워, 우성.

- 나를 알고 있었습니까?

- 편지에 써 있었다뿅.

- 그럼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부를지도 말해줘야지. 

 

우성의 말에 그는 다시 뒤돌아 우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볼이 방긋 솟도록 빙긋 웃었다. 

 

- 맞춰 봐, 뿅.

 

어린아이 장난처럼 말을 톡 쏘고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성은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듯 부스스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하하….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우성은 문득 손을 들어 입술 끝을 매만졌다. 소리 내 웃어본 기억이 아득히 멀어 조금 전의 웃음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입꼬리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우성은 그가 사라진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 낯선 반응임을 의식하고 있는 순간에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 결국 우성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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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눈을 감으면 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우성은 제 귀로 듣는 자신의 웃음 소리가 낯설어 몸을 뒤척거렸지만 꿈에서 깨진 못했다. 

‘우성’은 더이상 두려울 게 없다는 듯 밝게 웃었고, 그럴 때마다 눈 안에서 빛이 반짝였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늘 같았다. 언제든 우성은 그를 보며 남 부러울 게 없다는 듯 충족한 행복을 느꼈다. 애달프게 부르며 엉겨붙기도 했다. 우성이 큰 몸을 구겨 넣으면 그는 팔을 벌려 벅차도록 꽉 끌어안아주었다. 허리를 약간 구부정하게 굽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 우성은 그런 제 얼굴이 낯설어 꿈에서 깬 후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똑같이 삶이 무료하고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서야 우성은 꿈 속의 모습이 어쩌면 과거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했었다. 그러나 인정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상황이 역전되어 꿈 속의 그는 행복으로 충만하고, 현실은 수렁과도 같게 변모했다. 현실의 행복을 꿈에 빼앗긴 건지, 아니면 우성도 그처럼 사랑으로 행복을 찾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암시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프고 서러운 현실도, 눈꼴 시리고 배 아픈 꿈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익숙해졌다. 반응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 이제 우성은 일과처럼 행해지는 구타와 뜻 모를 분노와 질투에도 반응하지 않게 되었고, 꿈 속에서 저와 얼굴 모를 누군가 껴안고 입술을 부벼도 그러려니 했다. 

 

다만 그 사람의 얼굴만은 늘 궁금했다. 분명 눈 감았을 땐 선명히 보이는 듯 한데, 눈 뜨고 나면 환상처럼 사라졌다. ‘우성’이 애달피 부르던 이름도 씻은 듯이 지워졌다. 

꿈 속의 그를 찾으면 현실에서도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어서 우성은 그를 찾아 헤매기도 했었다. 어떻게든 꿈 속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어떤 날엔 머리맡에 공책을 두고 연필을 꽉 쥔 채 잠들기도 했다. 하굣길을 부러 멀리 돌아 오거나 일 없이 바깥을 떠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커녕 그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었고, 현실이 되려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 곧 관뒀다. 

 

추천 전형으로 입학하게 된 그 산왕이 ‘공업’ 고등학교인 데다, 농구부 규정 상 머리를 빡빡 밀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일말의 희망조차 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을 찾는 건, 그렇게 맑게 웃을 수 있는 건 아마 성인이 된 이후겠구나 생각했다. 

이미 꿈은 우성에게 있어 삶의 예고 같은 거였고, 부정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배경이 다른 만큼 행위는 달라고 결과는 결국 같아진다는 걸 체념과 무기력을 통해 깨달았으니. 꿈 속의 자신처럼 사랑을 찾고, 눈 뜨면 또다시 내일이 기다려질 만한 행복을 얻는 건, 이 빡빡이 소굴 사이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우성은 체념한 채 이목구비조차 분간되지 않는 수십 명의 민머리들과 줄을 맞춰 섰다. 확실히 농구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라 그런지 농구부 입부를 위해 입학한 애들만 해도 열 맞춰 몇 줄을 설 정도였다. 우성은 그런 신입생들 중에서도 맨 앞 한 가운데 서서 감독과 주전 선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어쩌면 당연한 대우이긴 했으나 우성은 그게 좀 거북하게 느껴졌다. 등 뒤에 선 다른 애들이 자기가 편애 받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또다시 저를 끌어내리려고 할까 봐 불안했다. 불안함은 손끝을 틱틱 튕기는 작은 행위로 드러났지만, 그 작은 소리는 체육관 문 열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우성은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곳을 돌아봤다가, 제 주변의 빡빡이들이 뒷짐 진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따라 했다. 어정쩡하게 자세를 잡고 선 우성의 시야에 하얀 농구화 하나가 와서 멈췄다. 

 

“정렬 뿅.”

 

뿅?

낯익은 말투에 은근슬쩍 눈을 들어 소리 나는 곳을 힐끔댔다. 건장한 빡빡이들을 거느리고 서 있는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보였고, 우성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헛숨을 삼켰다.

 

우성은 한 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름마저 알 수 있었다. 지난 꿈들이 물밀듯이 떠밀려와 온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그를 항상 ‘명헌이 형’ 하고 불렀다. 다정한 사랑의 소리로.

그는 나의 연인이었다.

 

 

 

 

 

 

 -·- 

 

 

 

 

 

 

빡빡이가 내 운명의 상대라니. 애초에 남자라니. 우성은 놀라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명헌을 보자마자 꿈 속의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고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처럼, 명헌을 보면 심장이 뛰는 게 당연한 일인양 느껴졌다.

체육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명헌이 가까이 있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 떨려서 우성은 내내 뚝딱거렸다. 농구는 뒷전이고 자꾸만 눈이 그를 따라 갔다. 한 쪽에서 감독과 얘기를 나누던 명헌이 문득 우성을 돌아보더니, 다가와 “네가 우성이지 뿅?” 했을 때 우성은 깜짝 놀라 펄쩍 뛰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 네! 정우성 입니다.”

 

가까이서 바라본 명헌은 저보다 약간 작고, 그러면서도 듬직한 풍채를 자랑했다. 우성은 대답하는 것조차 잊고 명헌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꿈 속에서 우성이 얼굴을 부비며 입 맞추던…. 이따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목덜미를 향해 숨을 불어넣으면 명헌은 간지러운 듯 움찔거리면서도 웃곤 했다. 

선배도 그럴까? 우성은 명헌을 내려다보며 상상을 했다. 

 

명헌은 들고 있던 기록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우성에게 “저쪽으로 가서 짝 짓고 스트레칭부터 해, 뿅.” 했다. 

명헌이 볼펜 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어림 잡아 열 쯤 되는 신입생들이 서 있었다. 두 줄로 열을 맞춰 서서 짝을 짓고 서로 스트레칭을 도와주던 때였다. 제일 끄트머리에 선 한 명이 눈치를 살핀 뒤 조용히 화두를 올렸다. 

 

“주장 선배님. 뭔가 이상하지 않아? 무슨… 컨셉 잡는 건가?”

 

하필이면 그 애가 우성 쪽을 향해 말을 꺼낸 탓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우성을 향해 꽂혔다. 우성은 등허리를 쭉쭉 펴다 말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상해 보이진 않는데.”

“그래?”

“오히려 귀여운 소리 아닌가?”

“그래 뿅?”

 

누군가 숨을 헙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이 돌아온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명헌은 들고 있던 파일철로 우성의 새빨간 뒷목을 꾸욱 눌렀다. 차가운 감각에 우성이 파드득 뛰어올랐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탓에 눈이 마주치게 됐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꼭 잘 익힌 알밤 같아서, 명헌은 웃고 말았다. 

 

 

 

우성은 명헌의 웃는 얼굴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비록 푸핫, 하자마자 바로 표정을 갈무리한 탓에 오래 보진 못했지만. 꿈에서 본 거랑 똑같네. 생각했다. 아닌가? 꿈에서는 더……. 생각하자 머리 끝까지 피가 몰리는 듯 했다. 체육관 벽에 기대 서서 우성은 스트레칭 하는 명헌을 힐끔거렸다. 

 

저 이미 선배를 알고 있었어요. 제 꿈에 나왔던 사람이 바로 선배였어요. 보자마자 알았어요. 선배도 제 꿈을 꾼 적 있어요? 우린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요? 선배 그런데 꿈 속에선 제가, ……

선배도 저를,

……

혹시 우리는 이번에도 어쩌면……

 

가슴 속부터 밀려드는 말들을 삼키는 게 괴로운 일이라는 걸 우성은 난생 처음 느꼈다. 명헌에게 제 꿈 얘기를 들려 주고 혹시 명헌도 제 꿈을 꾸는지 알고 싶었다. 

 

 

 

 

 

 

 ·-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우성은 명헌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 데에만 두 달을 소요했다. 연습 시합을 하고, 주전 등번호를 받고. 그러는 동안에도 우성은 부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말을 걸 일이 별로 없었다. 주변을 은근슬쩍 맴돌아도 주장은 바쁜 직함인지라 우성에게 관심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도 명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탓에 다른 선배들은 우성을 명헌의 껌딱지 정도로 인식하는 듯 했으나 정작 명헌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따라다니든지 말든지. 말을 걸면 무성의하게라도 대답해주긴 했으나 먼저 말을 걸어주는 건 많지 않았다. 

 

우성은 작전을 바꿔 물량 공세를 펼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기숙사 사는 고등학생이 줄 수 있는 거라곤 급식에 가끔 나오는 요구르트 같은 것들 뿐이었다. 우성은 그런 주전부리들을 꾹 참고 챙겨두었다가, 명헌에게만 몰래 건넸다. 

 

처음 요플레를 건네며 “선배님 드세요.” 했을 때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명헌은 아마 모를 테다. 명헌이 요플레를 안 좋아한다거나 이걸 왜 나 주냐거나 하면 어떡하지 하고 우성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나 명헌은 우성을 한 번 슥 쳐다보고는 “뿅.” 한마디를 남긴 채 떠났다. 

 

뿅? 좋다는 거야 고맙다는 거야 뭐야?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모르겠던 한 마디도 여러 번 듣다 보니 대강 파악이 됐다. 짜요짜요 2개, 요구르트 3개, 쿨피스 1개를 바침으로써 일궈낸 발전이었다. 

 

오늘 우성은 요플레 복숭아맛 1개를 가져다 바치고 ‘기분 좋음’의 뿅을 들었다. 오늘따라 명헌의 기분이 꽤 좋은 듯해 우성은 은근슬쩍 물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우성은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시선은 길을 잃고 저 먼 어딘가를 향해 도르륵 굴러가고 있었다. 명헌은 그런 우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지금까지 그건 다 뇌물?” 물었다. 우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게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그건 그냥 좋아서 준 거라고요.”

“좋아서, 뿅?”

 

아니 그게 아니고 서둘러 변명하려던 우성은 우연찮게 보고야 말았다. 체육관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있던 명헌의 뒷덜미가 서 있는 우성의 눈에 훤히 내려다보였다. 한여름도 아닌데 불 질린 듯 목울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씨가 옮겨 붙는 듯 우성의 목도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좋아서 맞아요. 맞는, 맞는데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만 같았다. 쿵쾅거리는 명헌에게까지 닿을까봐 우성은 가슴을 졸였다.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흙 묻은 앞코나 바라보던 우성은, 명헌이 한참이나 말이 없기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았다. 명헌은 묘한 눈으로 우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것도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어딘가 아득한 먼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형이라고 부르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명헌은 그제야 우성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쪼그려 앉았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면서 명헌은 “마음대로 해.” 했다. 

 

 

 

 

 

 

 · 

 

 

 

 

 

 

한 번 ‘형’ 호칭을 트고 난 이후로 우성은 거침이 없었다. 누가 보면 명헌이 모든 걸 다 허락해준 것처럼 은근슬쩍 발을 뻗어 왔다. 중식이나 석식을 먹고 나서 명헌이 약 10분 간 운동장을 돌거나 건물 구석에서 곤충 구경을 할 때마다 우성은 귀신같이 명헌을 찾아왔다. 

어떨 때는 그 날 하루 있었던 일을 꺼내 늘어놓았고 또 어떤 때는 말없이 그저 곁을 지키기만 했다. 옆에서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꿈에서 본 나의 연인이었단 점을 제하고 봐도 그랬다. 보통 사람도 옆에서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나? 이렇게 손만 만지고 놀아도 두근거리나? 

 

“형.”

 

오늘 명헌은 미술실 앞 화단에 앉아 개구리 구경을 하는 중이었다. 풀숲 사이에서 귀신같이 개구리를 찾아내 손가락으로 말랑한 피부를 콕 누르면 개구리가 폴짝 뛰었다. 우성은 그 옆에 딱 붙어 앉아 개구리를 관찰하는 명헌을 관찰했다. 

 

“형, 명헌이 형.”

“뵤용.”

“개구리 만지는 거 안 싫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명헌은 우성을 돌아보았다. 표정 변화가 크진 않았지만, 싫으면 이러고 있겠니? 하는 마음이 시선에서 묻어났다. 

 

“그럼, 제 손 만지는 건요?”

 

명헌은 지켜보고 있던 개구리가 저 멀리 튀어가든 말든 우성을 홱 돌아보았다. 오른손을 삐죽 내민 채 마치 한 번 잡아보라는 듯 하고 있길래, 명헌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잡아줬다.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게 빤히 보였다. 

 

“개구리 만진 손인데, 뿅.”

“뭐 어때요.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또 뭐.”

“저랑 맨날 같이 있는 것도 싫지 않죠?”

 

명헌은 물끄러미 우성을 바라보았다. 왜 좋냐고 안 물어보고? 싶었지만 뭐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싫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우성은 “음, 그럼요-” 하며 또 머리를 굴렸다. 

 

“같이 농구하는 건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닐 거고.”

“뿅.”

“저랑 주말 내내 같이 노는 건요?”

“그건 가끔 귀찮아.”

 

엑. 우성은 예상치 못한 답안에 조금 상처 받았다. 윗입술이 삐죽,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명헌은 새 부리 같은 입매를 보고 몰래 미소를 삼켰다. 

 

“저랑 포옹하는 건 안 싫죠?”

“음. 응.”

 

포옹 정도야 뭐 농구부에서 누구와도 하는 정도의 스킨쉽이니까. 명헌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더 고민하는 듯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제 앞에서 눈 감아도 싫지 않죠?”

 

손가락이 꼼질꼼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명헌은 잠시간 우성을 바라보았다가, 곧 말없이 눈을 감았다. 작게 심호흡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인기척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말랑한 감촉이 입술 위를 지긋이 내리누르고 떨어졌다. 

명헌은 부러 “이제 눈 떠도 돼, 뿅?” 물으며 눈을 떴다. 온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계란 같은 남자애 하나가 앞에 있었다. 눈을 꾹 감은 채로. 

 

“뭐 해?”

“…눈 감고 있는 거 좋아해서….”

 

꾹 감은 눈이며 앙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명헌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활짝 휘었다. 우성은 힐끔 한쪽 눈을 떴다가 명헌의 환한 미소를 마주하는 행운을 얻었다. 40분 풀 경기를 뛴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에 땀이 차올랐다. 명헌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그랬다. 코끝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명헌은 “눈 감는 거 좋아한다며?” 핀잔했다. 

우성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명헌의 옆에서 하루 12시간 정도는 눈을 감고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형은 운명 믿어요? 전 믿는데. 그것도 형 때문에 믿는 거예요. 말만 반지르르한 거 아니라구요. 들어봐요. 저 사실 오래 전부터 꿈을 꿔왔어요. 거기서 형을 봤어요.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예요. 처음 꿈을 꿨을 때는—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형을 만났어요. 그때 이후로는 다신 안 볼 사이가 될 줄 알았는데— 저 그때까지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어요. 근데 입학하고 농구부에서 형 보자마자 알았어요. 꿈에서 본 그 사람이라는 거. 아마 그 꿈은 제 예지몽이거나 뭐 전생이거나 그런 거겠죠? 둘 중 뭐가 됐든 우리는—

- …….

- 꿈이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까 거짓말 같죠.

- …진짜 그랬어? 꿈에서? 저런 게 보였어?

- 네. 진짜로! 형하고 나는 전생이든 다른 세상에서든 운명이란 말이예요.

 

 

 

 

 

 

 ···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인터하이를 앞두고 우성은 학교 뒷산에 있는 작은 사찰을 찾았다. 워낙 으슥한 곳에 있는 데다 계단 수가 많아 찾는 사람이 드문 곳이었지만 우성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침 운동도 되는 데다 소원도 빌 수 있다니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되려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마음 속으로 삼백까지 수를 세며 재단 앞에 도달한 우성은 두 손을 모으고 바르게 섰다. 모은 손 위에 이마를 가까이 대며 신을 향해 소원을 말했다. 명헌과의 연애전선도 이상 없는 지금, 우성이 고려할 만한 거라곤 농구 뿐이었으므로 소원은 자연스럽게 농구에 대한 것만 흘러나왔다. 

떠나기 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걸 할 수 있기를, 내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걸 내게 주기를. ……먼 땅으로 떠나 우리 멀어진다 해도 지금처럼 영원히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성은 감았던 눈을 떴다.

 

모았던 손을 풀자 눈을 감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기묘한 반짝임이 눈에 띄었다. 재단 사이 돌 틈에 박힌 무엇인가 아침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우성은 허리를 숙여 틈 사이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끼 낀 틈 사이에 기다랗게 끼인 건 금속이었다. 음각으로 무늬가 아로새겨진. 

 

반지였다. 우성은 이걸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우성은 본 적이 있었다.

우성이 명헌에게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며 건네었던 맹세의 증표였다. 반지를 나눠 끼고, 함께하는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겠노라 맹세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우성은 잠결에도 눈물을 흘렸었다. 

 

우성은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틈 사이를 헤집었다. 반지 아래에 나뭇가지를 박아 넣고 비스듬하게 기울이니 틈 사이로 동그란 물체가 툭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서 빙그르르 도는 반지를 집어 우성은 표면의 무늬를 확인했다. 

그러나 틀림 없었다. 꿈 속의 그 반지가 맞았다. 겉면에는 우성이 직접 아로새긴 무늬가 있었고 안에는 우성과 명헌의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우성은 그 글자를 확인한 순간 털이 삐죽 솟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여태껏 계속해서 꿈을 꾸며 그게 나의 과거였을 수도 있다고, 혹은 배경이 다른 예지일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실로 현실에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형과 난 진짜 운명인 걸까? 우린 시간을 돌고 돌아 그 언제라도 서로를 사랑하게 되나? 생각하자 미칠 듯 가슴이 뛰었다. 이 반지를 발견한 게 마치 신께서 제게 내리는 해답과도 같이 느껴졌다. 우성이 멀리 떠나게 되더라도 운명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처럼 느껴졌다. 

 

반지를 꽉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성은 마음 속으로 깊은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자꾸만 바보처럼 뺨이 부풀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성은 바보처럼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계단을 뛰어내렸다. 지금 당장 명헌이 보고 싶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숨을 나누고 싶었다. 이 벅찬 마음을 형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

 

 

 

 

 

 

인터하이에서 우승한 뒤 떠나기 전 명헌에게 반지를 보여주며, 이건 우리가 운명이라는 증거라고, 우리 이렇게 잠깐 떨어지더라도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우린 영영 끊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던 우성의 계획은 산산이 깨어졌다. 

 

쓰라린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느라 우성은 남은 시간을 다 써버렸고, 결국 명헌에게 반지의 존재는 알리지 못한 채 머나먼 타국으로 터를 옮겼다. 안녕, 인사하는 명헌의 얼굴은 초연하고 담담해 보여서, 우성은 먼 나라에서 자신이 괴롭고 지칠 때 명헌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쓰기 위해 반지를 챙겼다. 언젠가 남은 하나를 찾아 한 쌍을 다시 완성하면 그때 형과 나눠 껴야지, 하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노라 하면 그 어떤 외로움도 슬픔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반지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우성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목걸이 줄 하나를 사서 반지를 걸었다. 유니폼이며 사복 안 쪽에 반지를 걸고 있으면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론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도 옷 속에서 반지를 꺼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곧 괜찮아졌다.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고 하나 없는 타향에서 우성을 버티게 하는 힘은 그런 거였다. 명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보는 것. 꿈 속에서 반지를 나눠 낀 연인의 사랑을 보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명헌에게 전화를 거는 일 같은 것. 이들은 우성을 버티게 하는 축이었다. 하나라도 무너지면 우성을 주저앉게 할.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언제든 우성을 주저앉게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몇 년 전 목걸이를 묻은 전우를 제외하고 ‘우성’은 명헌의 가족을 본 적이 없었다. 너무도 닮지 않은 형제, 언급조차 없는 부모님. 우성은 눈치껏 명헌의 가정사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고 그래서 캐묻지 않았다. 명헌도 달리 설명하지 않았고. 우성은 그저 지레짐작으로, 명헌이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거라고 생각했다.

 

명헌에게 ‘할아버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단 말이다. 심지어 그가 자신이 아는 얼굴일 거라고는 더더욱!

 

우성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분명 그때 그 노인이었다. 

죽은 왕비의 아비. 속죄라는 핑계로 우성이 전장으로 도망치는 계기를 준 사람. 왕조가 바뀐 뒤 힘을 모두 잃고 변방으로 물러났다던……. 

 

 

 

명헌은 굳어버린 우성의 팔을 끌어당겼다. 노인은 그런 명헌의 자연스러운 손길, 부드럽게 풀린 표정을 보았다. 손주가 데려온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는 나붓이 미소지으며 모두 긍정한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우성아, 내 유일한 진짜 가족이야.

 

명헌은 노인을 그렇게 소개했다. 우성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무헌이 형과 내가 닮지 않은 건 우리가 진짜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고.

- …….

- 너한테는 사실대로 말해주고 싶었어. 

 

진짜 가족 앞에서 명헌은 거짓된 연기조차도 벗어던졌다. 우성은 멍하니 명헌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명헌은 붙잡고 있던 우성의 팔에서부터 스르르 내려와 손을 맞잡았다. 친족 어른 앞에서 타인과 그리 가까운 접촉을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우성은 모르지 않았다. 

토악질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아 우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 그리고 할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늘 말해왔던 그 사람이요. 

- …….

- 할아버지께 늘 소개하고 싶었어요.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건 알아도요.

 

노인은 틈 없이 맞닿은 두 청년을 보고서도 얼굴 붉히지 않았다. 늘 그랬던 대로 은은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건 단 하나 남은 혈육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고 이해이기도 했다. 주름진 눈이 맞잡은 두 손에서 나란히 빛을 내는 장신구에 오래 머물렀다. 

 

 

 

창 밖으로 바람이 불자 노인은 얕게 기침했다. 명헌이 외투를 가져오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우자,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우성이 그리하였듯이 노인도 우성을 알아보았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어떤 거부도 분노도 표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으로 우성을 바라보며 그저 한 마디를 했다.

 

- 솔직하게 다 털어놓게. 그 앤 자넬 용서할 거야. 결국 그리 할 걸세.

 

우성의 낯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 그러니 솔직히 말해. 거짓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을 뿐이야.

- 알게 되는 순간이 파국이겠지요. 날 증오하게 될 테니까!

- 자네와 자네 부모가 행한 일이 아니잖나. 명헌이도 그걸 곧 이해하고 용서하게 될 걸세. 되려 속이려 하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나 노인의 그 어떤 말도 우성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우성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톱 밑을 계속 뜯어댔다. 왜 하필, 왜, 대체 왜……. 의문만이 머릿속에 남아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우성은 필연처럼 명헌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때 우성은 무헌과 명헌의 부모인 줄로만 알았던, 명헌이 최초로 부모의 죽음에 대해 털어놓던 순간이었다. 우성은 범인을 찾으면 복수할 거냐 물었고, 우습게도 한을 풀 수 있게 돕겠단 말도 했었다. 명헌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저와 제 가족이라는 걸 알지도 못한 채. 

 

 

-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악 다문 턱 밑으로 힘이 들어갔다. 우성은 이대로 결코 입을 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날 보았던 명헌의 분노와 슬픔이 생경하게 떠올랐다. 그 표정이 저를 향하길 원치 않았다. 저를 보는 눈에 애정이 모두 사라지고, 증오와 원망만이 남는 날이 온다면 정말, 정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그 다음 꿈은 군데군데가 끊어져 있었다. 여러 날에 걸친 일들이 조각난 채로 어긋나게 끼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맨 처음 그랬던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나부끼는 바람 소리 같은 것들만 들렸다. 음산한 분위기에 우성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지만 결코 깨어날 수 없었다. 

 

 

 

온 사위에서 거센 비바람 소리가 들렸고, 우성은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벼랑 위에 올라 우성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집채만한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성은 빗줄기 사이로 바다를 바라보았고, 이내 다시 일어나 돌아내려갔다. 숨가쁘게 뛰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비탈길을 구르기도 했지만 우성은 아픔도 모른 채 벌떡 일어섰다. 

 

우성은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집 문을 잡아당기자 손쉽게 열렸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열린 창문 사이로 비바람이 쳐들어왔다. 우성은 창을 닫을 생각조차 못한 채 곧바로 뛰쳐나왔다.

 

번개가 내리치고, 사위가 순간 밝아졌다 되돌아왔다. 우성은 말 위에 올라타 목줄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흥분한 말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성은 나동그라지듯 착지한 뒤 주택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고 발로 걷어 차고 몸으로 밀어붙이다 못해 창문을 깬 순간이었다. 유리 파편이 날림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성은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뛰어간 우성은 열린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 밖에서 방 안을 보고 선 우성의 등에서 빗물이 뚝 뚝 떨어져내렸다. 

 

온 사위는 고요했고 빗소리와 단 한 발의 총성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성은 방 안을 바라보고 선 우성을 한참이나 바라봐야 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지만 창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시간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우성의 뒷모습은 그대로 박제된 듯 미동조차 없었다. 번개가 치며 잠시 온 사위가 번쩍 빛났고, 우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우성은 우성을 똑바로 바라보는 듯 했다. 시간과 공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양. 어렸을 적 최초의 꿈과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다. 우성은 우성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언갈 중얼거렸다. 빗소리를 뚫고 우성의 목소리는 현실에까지 와 닿았다. 

 

 

 

 

 

 

 - 

 

 

 

 

 

 

우성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흠뻑 비를 맞은 듯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부르튼 손을 뻗어 닳을 정도로 외워버린 번호를 누르고, 우성은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받지 마라, 받지 마. 받지 마요……. 

그러나 매정하게 연결음은 뚝 끊어지고, 잠결인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우성아…….

 

난데없이 새벽을 깨운 사람에게 건네기엔 너무나도 다정한 어조였다. 우성은 좀 전까지만 해도 턱끝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저 먼 해저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슬픔과 서러움, 고통 같은 것들은 다 휘발되고 어디서 기원했는지 모를 죄책감만이 남았다. 

 

사랑으로 보내온 그 많은 시간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명헌의 마지막 얼굴만이 남아 아른거렸다. 각막에 아로새긴 것처럼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실제가 아니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절망만이 남은 얼굴이었다. 우성은 명헌이 그렇게 서글프게 울고 분노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더 꿈이 아님을 알게 됐다. 자신이 기어코 되살아난 탓에 명헌을 또다시 불행하게 할지 모른다고, 믿게 됐다. 

꿈에서 보았고 그리하야 현실에서의 우리가 운명이리라고 믿게 했던 그 모든 기억들이 사실은 우성이 명헌을 기만하고 불행하게 했던 악연의 시작이었다. 

운명이 아니라 악연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이번 생에까지 명헌을 괴롭히러 왔다. 

그의 가장 큰 불행밖엔 되지 못할 거면서.

 

같잖은 사랑으로 우성은 명헌을 절망하게 하고, 명헌은 우성을……

 

 

 

“……내 꿈은 다 틀렸어.

형은 나 사랑 안 해…….”

우성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차근차근 모든 걸 털어놓았다. 미국에 오기 전 학교 뒤에 있던 사찰에 갔다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재단을 발견한 일, 거기서 꿈 속 명헌과 우성이 나눠 꼈던 반지를 발견한 일, 미국에서 오고 나서부터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고, 알고 보니 명헌의 삶을 망가뜨린 게 우성의 가족이었고 우성은 그걸 알면서도 숨겼고 그래서 명헌이 우성을 원망하고 증오하다 못해 죽었고……

 

명헌의 죽음을 말하며 우성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우성이 낯선 땅에서 울다 못해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명헌은 가슴을 졸였다. 그래서 ‘우성아, 진정해’ 이런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말을 잇기 어려운 건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 과정은 달라도, 결과적으로는 늘 꿈과 같이 흘러갔어요, 모든 게.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어요. 이상하게 들릴 거 알아요. 형 근데 나… 형이 날……

“……내가 죽고 너는… 넌 어떻게 됐는데?”

 

입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명헌은 긴장한 듯 전화선을 베베 꼬았다 풀며 손을 가만 두지 못했다. 우성은 조금 전 명헌의 죽음을 입에 올릴 때와는 달리 차분하고 초연한 목소리로, “죽었어요.” 말했다. 

 

- 부모님이랑 동생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집에 불을 질렀어요.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마지막이에요.

 

명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죽었다고?”

 

-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무미건조한 그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끼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묻지 말 걸. 궁금해하지 말 걸. 명헌은 곧바로 후회했다. 그간 애써 잊고 살아왔던 우성의 마지막 얼굴이 되살아나 들불처럼 가슴에 번졌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꺼지지 않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명헌은 새로운 생 속에 있었다. 이전과 같은 가죽을 뒤집어 쓴 채. 명헌은 그래서, 제 시도가 실패했거나 그리하여 미쳤거나 혹은 환상을 보는 것이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이라기엔 끝이 있었고 고통을 느꼈다. 물리적인 건지 심리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명헌은 고통을 느꼈다. 그로부터 어떻게 달아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명헌의 혼란을 가중시킨 건 눈에 익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눈을 떴더니 늘 그리워했던 부모님도 그대로였고, 죄책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던 형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분명 뭔가 달라진 것 같았지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살아가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행복해 해서. 명헌은 혼란을 느끼면서도 무너졌던 마음 언저리가 채워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다시 성인이 될 무렵 즈음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원망했던 사람이 어쩌면 환상이며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가족을 더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 지나친 악몽을 본 것 뿐일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또 한 번 다시 눈을 떴을 때 명헌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새로운 삶에서 사랑하는 가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명헌은 낯선 부모를 만났다. 그들은 첫 아이인 명헌을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명헌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낯선 땅을 누비며 형의 이름을 불러보고 어머니 아버지 하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결코.

 

 

 

명헌은 네 번째로 눈을 떴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이름으로. 또 다른 부부가 명헌을 낳았고, 이번엔 동생이 생겼다.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이는 여자아이였는데, 명헌은 그 애를 볼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우성이 너무나 아끼고 늘 미안해하며 마음 쓰던 그 아이가…

 

명헌은 처음 그 생각을 했을 때 분에 차서 울었다. 악몽이었다 치부하려 해도 너무나 생경하게 남은 기억들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삶이 반복되는 이유가 어쩌면, 첫 삶에서 제가 자살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꼭 우성이 떠올랐고, 왜 우성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자살이 몰살보다 큰 죄란 말인가! 하며 가슴을 쳤지만 우성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다섯 번째. 돌아오라는 가족은 돌아오지 않고, 명헌이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던 얼굴이 명헌을 찾아왔다. 우성을 낳은 사람들이었다. 명헌이 증오하고 저주해야 할 사람. 그들은 태초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부러 명헌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속죄하기 위하여. 

명헌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그들을 일갈했다.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고, 끝내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어머니 아버지 외치며 울자 이번 생의 부모가 아연실색하며 달려왔다. 걱정 어린 얼굴로 달려오는 얼굴이, 제가 기다리던 것과 달라서 명헌은 더 섧게 울었다.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우성의 부모는 명헌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다시는 속죄니 용서니 운운하지 않았다. 그저 쥐 죽은 듯 살아갔다. 우연히 마주치면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고 지나갔고, 때때로 명헌의 집 근처에 귀한 것들을 두고 사라졌다. 처음 그들이 집 앞에 귀한 약재를 두고 갔을 때 명헌은 그를 다 불살랐고, 그 다음에 놓고 간 비단으로는 목을 매달았다. 

 

그 뒤로 몇 번이 또 지나고. 어느 날 명헌은 물 건너 온 향신료 한 줌을 놓고 가려던 우성의 아비와 마주쳤다. 그 즈음 명헌은 지쳐 있었고, 그래서 그를 내쫓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하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명헌은 그런 그를 보며- 

우성도 눈치를 볼 때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곤 했었는데. 아비를 닮은 거였구나. 생각했다.

생각했고, 그런 자신이 참을 수도 없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 그 앤, 어떻게 됐습니까.

 

난데없이 밀려온 우성의 생각 때문인지 의식 없이 말이 튀어나갔다. 

명헌의 질문에 잠깐 멈칫했던 그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보다 일찍 죽었다면 당연히 알지 못할 게 빤해 명헌은 더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우성의 최후를 알고 있다면 그게 더,

…….

 

- 그때,

- …….

- 내 가족을 죽인 게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에게서 독을 가져간 사람이 누군지… 말해줘요.

- …죄송합니다.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 그런 것 하나 알지 못하면서 온 죄가 다 제 것인냥 군단 말입니까?

- 갈 곳 없는 원망은 결국 내게로 돌아옴을 알기 때문입니다.

 

명헌은 그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 밤 명헌은 밤중에 홀로 밖으로 나가 바다를 보았다. 온 사위가 어두워 파도소리만 들릴 뿐 물과 뭍의 경계가 가늠되지 않았다. 애매한 경계에 발을 반쯤 담그고 서서 명헌은 파도 소리를 들었다. 

 

물결을 따라가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물은 늘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려주죠 물에서 죽으면 바다는 나를 다시 뭍으로 돌려보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시 되돌아왔어요 죽을 수 있다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싶어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바람도 없이 매서운 파도가 일었고, 하얀 거품이 명헌의 허벅다리를 쓸고 지나갔다. 거센 물결에 몸이 기울어휘청거리다가 명헌은 다시 뭍으로 돌아나왔다. 가슴까지 솟구쳐오른 파도 때문인지 온 얼굴이 흠뻑 젖은 채였다. 

 

- 지겨워……

 

그때 되돌아오길 정말 잘했죠 죽어 돌아오지 않길 잘했어 다시 되돌아와 형을 만나서 나는

 

 

 

온몸이 흠뻑 젖었던 명헌은 당연스럽게도 열이 올라 크게 앓았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아파본 적이 없었다. 열 오른 몸 마디마디마다 통증이 일었고 버썩 마른 목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눈이 너무 화끈거려 두 눈을 도려내 찬물에 담그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었다. 

 

가족을 일찍이 잃고 홀로 살아가던 이번 생의 명헌의 보호자가 된 건 모순적이게도 그들이었다. 명헌이 열에 취해 까무룩 기절하듯 잠든 때에도 그들은 그의 머리맡을 지켰다. 명헌은 끊어진 기억 사이사이로 누군가 제 머리 위에 찬 수건을 올리는 걸 느꼈다. 아주 오래 전 느껴본 적 있던 다정한 손길이었다. 속에서부터 신물이 왈칵 치밀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기는 손길을 느끼며, 명헌은 무거운 눈을 들어올렸다. 바싹 말라 부르튼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열에 취해 명헌은 유언처럼 말했다. 이제…… 명헌의 가슴 속에서부터 조각조각 흩어져 새어나온 글자는 그들의 귀에 닿고서야 겨우 한 마디가 되었다. 

 

타오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명헌은 그들이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바랐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수 있도록.

 

 

 

 

 

 

 ·--- 

 

 

 

 

 

 

명헌아

죄를 물어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누구나 뜻하지 않게 죄를 짓고 살게 됨을 기억해라

기억은 영원하나 영원하지 않은 것

과거에 사로잡혀 미래를 잃지 마라

나는 네가 사랑을 알며 살길 바랐지 복수하라고 널 숨겨둔 게 아니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들로 삶을 허비하지 말아라

할아비의 마지막 소원이야

명헌아

부디…….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마지막 읍소를 올립니다

사랑으로 이해하게 하시고

후회하는 아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 

 

 

 

 

 

 

명헌은 외로움을 느낄 각오와 함께 눈을 떴다. 그러나 명헌의 곁에는 또다시 우성의 부모가 있었다. 

명헌은 다시 한 번 그들을 마주했을 때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미안함을 느꼈다. 가라고 할 게 아니었던 걸까, 다 용서한다고 이제 내게 죄를 말하지 말라고 확언했어야 했던 걸까? 나 때문에 다시 반복되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하고 명헌은 부채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명헌을 향해 그저 빙그레 웃으며,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을 뿐이었다.

 

다시 태어났는데도 명헌이 또 앓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명헌은 잠깐이나마 외로움을 잊게 됐다. 어찌저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 집에 나란히 방을 나눠 살며 명헌은 묻고 지내왔던 지난 기억들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푸르른 녹음의 나날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무릎까지 눈이 쌓이고, 그럴 때마다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 주고 빨갛게 얼어붙은 코 끝을 마구 부비던……. 

 

눈 내리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명헌은 “거기서도 눈이 많이 왔었죠.” 하고 운을 띄웠다. 그들도 하얀 설원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 겨울만 되면 눈이 많이 오는 게 싫었어요. 아이들은 찬 바람에 약하니까….

- 그런 것 치곤 둘 다 눈을 좋아하던데.

 

명헌은 무심결에 대답하고서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태연하게 말을 꺼내 놓고 안달복달 하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까봐 명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물이 혀 끝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 맞아요. 날이 추우면 길이 얼어 다칠까봐 그렇게 말려도, 눈만 왔다 하면 망아지들처럼 뛰쳐나가곤 했었죠.

 

우성의 아비는 말없이 과일 접시를 명헌의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겨울엔 보기 드문 귀한 과실들을 보며, 명헌은 또다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눈발처럼 기억이 내리는 것만 같아 손끝이 차게 얼어붙었다. 

 

- 이젠……. 눈도 지긋지긋하네요. 어차피 반복되니까.

 

처음엔 분명 좋았던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명헌은 말린 다래 하나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 함께 겨울을 맞는 건 지난 번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요.

 

마지막 말은 온점과 물음표 사이의 어조로 흘러나왔다. 우성의 아비는 대답을 말 없이 손에 쥔 석류 몇 알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낱알들이 손안을 구르며 추위에 달아오른 아이 뺨 같은 색을 내었다. 

 

- 의지대로 돌아온 것은 아니나,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

-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올 겨울은 눈은 그때 함께 본 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인지, 무릎까지 쌓였던 눈이 녹자 거리 곳곳에서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리에선 나부끼는 꽃비 사이로 꿀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녀 달콤한 봄내음이 물씬 풍겼다. 

 

명헌은 창 밖으로 낙화를 구경하다가 그들의 손이 이끌려 나왔다. 오며 가며 듣자 하니 오늘 마을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리기로 했다니 새 부부를 축복할 겸, 함께 꽃 구경 마을 구경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거절하자면 얼마든 안 간다 할 수 있는 있었지만 요즈음 명헌은 그들에게 다시금 무르게 굴게 되곤 했다. 

 

산 아래 길을 따라 마을로 걸어가며 그들은 태초의 추억을 꺼내놓았다. 

평탄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예식만은 꽃 피던 봄에 치렀다고 했다. 석조저택 주변을 빙 두른 벚나무가 그다지도 아름다웠노라고 회상하는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때마침 다 같이 걷고 있는 길 주변에도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만개해 있었다. 영원의 맹세를 하는 새 부부에게로 사람들을 인도하듯, 벚나무는 길을 따라 주욱 이어져 있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을 수록 행복한 기운이 가까워졌다. 

명헌 일행은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의 한 걸음 뒤에 서서 식을 구경했다. 단정히 차려 입은 사내가 하객들을 향해 인사하며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숨길 수 없이 넘쳐 흐르는 기쁨과 행복이 보였다. 웨딩 로드의 끝까지 가서 선 그는 긴장한 듯 양 허벅다리에 붙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면서도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출 줄 몰라 하며 웨딩 로드 초입을 힐끔거렸다. 하객들도 신랑과 같이 들뜬 기대감을 안고 신부의 등장을 기다렸다. 

 

아름다운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화동들의 뒤를 따라 신부가 찬찬히 걸어나왔다. 긴장한 듯 크게 심호흡하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였다. 새 신부라기엔 어딘가 말괄량이 같은 기질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명헌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무심결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오라버니, 하고 저를 따르던 그 조그만 여자애도 긴장할 때면 꼭 흉곽이 가죽 위로 드러나 보이도록 크게 호흡하곤 했었는데. 생각하던 명헌은 어딘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신부의 걸음을 좇아 눈을 돌렸다. 

 

반투명한 베일이 드리웠어도 명헌은 그 말간 웃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명헌조차 한 눈에 알아본 얼굴을, 그들이, 부모가— 몰라볼 리 없었다. 신부와 나란히 선 신랑이 베일을 들어올릴 때 명헌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쌓인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뜻 후련하기까지 해 보이는, 말간 웃음이 그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 있었다. 

 

명헌은 불현듯 알 수 있었다. 삶이 반복되는 건, 이따금 옛 기억을 가진 사람이 생겨나는 건, ……

죄 때문이 아니라 미련 때문이었다. 이 삶에 남은 감정을 털어내지 못한 자들만이 돌아오거나 떠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명헌은, ……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 

 

 

 

 

 

 

한 날 한 시에 잠자듯 눈을 감은 부부를 땅에 묻으며 명헌은 제 가설이 곧 증명되리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명헌은 평평한 무덤 위에 벚나무 가지를 심었다. 

흙 묻은 손을 털고 두 손을 모아 고별하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풀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본 명헌은 난생 처음으로 심장이 발 밑까지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부모의 죽음을 양분 삼아 태어나는 새끼를 목도한 것만 같았다. 

 

삽 같은 걸로 하십시오. 손을 갈아 넣을 게 아니라면.

- 그렇게 맨손으로 파헤치다간 다쳐요.

 

심장을 잘게 쪼개어 고막에 붙여둔 것처럼 쿵쿵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명헌은 주춤주춤 일어나,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얼핏 간절하게도 들리는 그 소리에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가까이 다가왔다. 자켓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명헌의 손에 친절히 쥐어주기까지 하면서, 우성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절 아세요?

 

혹 우성이 미련일랑 다 버리고 떠나 영영 이별하고, 홀로 이 세상을 떠돌게 되는 비극까진 상정했어도 우성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가정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명헌은 얼이 빠진 채로 우성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 뛰어대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 깨끗이 빨아서, 돌려주실래요? 아끼는 거예요. 

 

세상에 누가 아끼는 걸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덥썩 쥐어준단 말인가? 서툰 거짓말이 빤히 보였지만 명헌은 구태여 말을 얹지 않았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입을 열면 거품이 일 것 같았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오랜 시간 지나 그립다 깨닫게 된 우성인지, 아니면 우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타인인지 명헌은 알 수가 없었다. 

 

 

 

 

 

 

 · 

 

 

 

 

 

 

그 이후로 우성은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이 눈을 뜰 때마다 늘 모든 걸 잊었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꼭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보이지 않는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며, 눈부신 미소로 ‘명헌이 형’ 하고 불렀다. 대담히 사랑을 말하는 날도 있었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했으나 언제든 뒷덜미며 귀 끝이 붉었다.

 

명헌은 그런 우성을 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날엔 홀로 모든 걸 다 잊은 그 애가 불쑥 미워졌고, 꼴도 보기 싫다고 내몰았다가 곧 후회했다. 슬프게 우는 얼굴을 볼 때면 태초의 그 날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아서. 그 눈물이 가엾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내가, 그런 나만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서. 

 

너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나는 뭘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묻고 싶어도 상대는 무지하니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명헌은 그저…… 슬픔에 잠긴 채 눈물 흘렸다. 무언가 고장난 듯 멈추지 않았다. 늘 매정하게 저를 밀어내기만 하던 명헌이 울자 우성은 그 눈물을 완전한 거절로 받아들였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성은 명헌을 쏘아보았다. 

 

- 왜 나를 매번 슬프게 하는 거예요.

- …….

- 날 좀 그냥 사랑해주면 안 돼요?

 

물으며 우성은 섧게 울었다. 명헌은 그 말에서 우성의 갈망을 보았다. 우성에게 남은 삶의 미련은 어쩌면 제가 원망과 분노를 버리고 사랑으로만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저처럼 모든 기억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거라면 우성이 왜 늘 모든 걸 잊은 채 나타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리하야 명헌은 사랑을 시도해보았다. 우성을 끝없이 사랑해봤고, 한 몸이 될 것처럼 으스러지게 안아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애정을 주어도 늘 다시 되돌아왔다. 지독한 반복이었다. 

 

 

 

 

 

 

 ·--·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제가 대체 뭘 더 해야 하나요. 무얼 할 수 있나요. 

그 앤 모든 걸 다 잊었는데 왜 저만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나요.

 

…그 앤 왜 자꾸 되돌아오는 건가요.

 

이 굴레에서

우리는 서로를 탓할 수 있나요?

 

 

 

 

 

 

 ···· 

 

 

 

 

 

 

이번 삶에서 만난 우성은 유난히 어리고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다. 애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힘껏 드러내는 그 앨 끝없이 받아주며 명헌은 이 다음 생에 대해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성과 만나는 시간도 빨라지고 죽음으로 끝나는 순간도 앞당겨지고 있었다. 이러다 소멸하게 되는 걸까? 이제 명헌에게 남은 기대는 이런 것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우성이 

 

- 저 사실 오래 전부터 꿈을 꿔왔어요. 거기서 형을 봤어요.

 

고백하기 전까지는. 

 

 

 

 

 

 

 - 

 

 

 

 

 

 

명헌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자마자 집을 나섰다. 먼 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명헌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차창 밖 풍경이 완전한 녹음으로 물들고서야 명헌은 발을 땅에 디뎠다. 그간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 의식적으로라도 찾지 않았던 곳이었다. 

 

저택이 서 있던 자리에는 타다 만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화마에 휩쓸렸다 다시 움트기 시작한 생명들과 잿더미만 남은 흔적들이 여기저기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명헌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무너진 집터 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일인 것처럼 저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성이 늘 껄끄러워 하던 샹들리에가 있던 자리, 우성의 방, 겁도 없이 올랐던 지붕과 이따금 함께 뛰어넘곤 했던 1층 끄트머리의 어느 창문……. 

 

검게 그을리고 바스라진 벽돌을 발끝으로 툭, 툭 걷어내며 걷던 명헌의 시야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걸렸다. 명헌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잔해들을 걷어내고 빛의 근원지를 찾아내려 했다. 벽돌 두어 개와 잿더미를 손으로 훔쳐내자 바닥에서 작은 은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지였다. 우성이 재단에서 발견했다는 것과 같은. 

 

명헌은 지금 제가 선 이 곳이 우성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죽었어요. 고저 없이 전하던 목소리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 

 

 

 

 

 

 

명헌은 가장 빠른 미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챙긴 짐이라곤 여권과 약간의 돈, 집 열쇠 그리고 그을린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좌석이 이어 붙은 좁은 기내 안에서 명헌은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았다. 조그만 창 밖으로 명헌이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벗어나본 적 없던 땅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제부터 이어진 고된 일정에 지친 몸은 금새 수면으로 나가떨어졌다. 명헌은 사위가 밝아지자마자 이것이 꿈 속임을 알 수 있었다. 제 옆에 있는 우성을 보자마자. 

 

반지를 품고 가는 길이니, 명헌은 우성과의 언약의 순간을 보게 될 거라 예상했다. 아득한 그 어느 날, 울창한 나무 아래서 증표를 나누고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그 기억을. 

그러나 명헌은 숲 한 가운데가 아니라 석조저택 앞, 나무 그네에 앉아 있었다. 우성이 바닥에 디딘 발을 움직일 때마다 앞뒤로 몸이 술렁거렸다. 별 것 아닌 움직임에도 두 사람은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웃었다. 삐걱거리는 소리 사이로 우성의 손가락이 그네 위를 불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이번엔 또 뭐라고 한 거야?

- 뭐라고 했을 것 같은데요? 맞춰봐요.

-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려줘야 맞추지. 우성, 치사한 구석이 있어 삐뇻.

- 왜 갑자기 삐뇻이에요? 

- 맞춰 봐, 삐뇻.

 

웃는 명헌을 바라보는 우성의 눈이 밤바다처럼 일렁거렸다. 개구장이처럼 웃다가도 이따금 이런 따스한 눈빛을 보내는 우성을 마주할 때면 명헌은 속이 울렁거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됐다. 우성은 명헌의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뺨을 쓸어내렸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양 명헌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이른 아침. 현관 앞에 서 봐도 집 안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뜰 즈음이라 우성은 아침 러닝을 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명헌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 문을 열었다. 기숙사를 떠나 첫 집을 구한 우성이 국제 소포로 보낸 물건이었다. 

 

인기척 없는 집 안에선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명헌은 스산한 거실 복도를 지나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실 협탁 위에는 처방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수면유도제 통이 놓여 있었다. 약병은 열렸다 닫힌 흔적이 있는데, 침구는 요며칠 사용하지 않은 듯 주름 하나 없이 펼쳐져 있었다. 

 

명헌은 우성의 동선을 가늠하듯 걸음을 옮겼다. 거실 소파 한 쪽에 담요가 반쯤 걸쳐져 있고, 탁자 위에는 수화기가 널브러진 전화가 있었다. 명헌은 흘러내린 담요를 잘 개어 소파 위에 올려 두고, 수화기도 제자리에 위치시켰다. 

수화기는 탁자 옆 쓰레기통에 반쯤 걸쳐진 채였는데, 쓰레기통 안에서 수화기 밑에 깔린 다른 무언가 보였다. 자그만 벨벳 케이스였다. 명헌은 쓰레기통 안에서 그걸 빼내어 뚜껑을 열어 보았다. 심장이 거듭 소리를 키워가고 있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이스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작은 보석 한 알이 간결하게 박힌 모양이었다. 명헌은 반지 하나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쪽에 우성과 명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말하면 너는 믿을까?

내게 모든 기억이 있고, 삶을 반복하고 있다고.

이번 생엔 네가 날 기억해서—

…………

 

명헌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떤 말을 붙여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우성이 지난 모든 추억을 기억하고, 그리하야 명헌이 내심 바라왔던 진심 어린 후회를 듣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목전에 두었는데도 명헌은 갈등했다. 우성이 기억을 찾게 된다면, 저가 기다려온 우성이 돌아온 것만 같아서 기쁠 줄로만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되려 이제는 우성이 오히려 모든 걸 다 잊어버렸으면 싶었다. 반복되는 삶 동안 우성이 한 번이라도 제게 용서를 구하기를 바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실에서 저지르지도 않은 먼 과거의 일로 죄책감 따위 갖지 않길 바랐다. 그냥 어쩌다 조금 들어맞은 꿈이라 생각하고 잊었으면 했다. 

명헌은 우성을 용서하고 싶었다. 이해하고 용서해서, 그 다음으로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명헌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제가 바라던 건 지켜지지 못한 언약을 지키는 거였다. 

못다 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실로 원하는 건 그것 뿐이었다. 우성이 제게 사죄하는 것도 속죄하는 것도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명헌이 바라는 건 미래였다.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이 쉬운 걸 너무 오래 걸려 깨달았다. 

 

 

 

잠시간 반지를 바라보던 명헌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그을린 반지를 꺼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벨벳 케이스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문고리에 열쇠 꽂아 넣는 소리가 들려왔고, 명헌은 현관으로 가 우성을 맞이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귀택하던 우성은 현관 앞에 선 발에 한 번, 고개 들어 마주한 명헌 얼굴에 한 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가움이 차오르다가도 순식간에 가라앉는 게 보였다. 목을 빙 감싸고 있는 목걸이도.

 

명헌은 손을 뻗어 우성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풀어냈다. 우성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명헌의 손이 잘 닿도록 구부정하게 무릎을 굽혔다. 그 모습을 보고 명헌은 결심한 듯 목걸이 째로 반지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우성이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명헌이 한 발 빨랐다.

 

“우성아.”

 

우성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도르륵 눈을 굴리다 명헌이 손을 들어 팔뚝을 살살 어루만지자 슬그머니 눈을 맞춰 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애처롭기까지 해 보여 명헌은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우성아. 나는 너 사랑했어.”

“…….”

“널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담담히 읖조리는 소리에 점점 높낮이가 생기더니, 파도치듯 울렁거렸다. 

 

“과거는 과거야.

너는 알지도 못하는 일로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꿈은 잊어.

우리는 내일을 살아야 해.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내가 원하는 건……”

 

입을 벗어나 나간 말이 다시 나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명헌은 차분히 숨을 눌러 삼키며 말했다.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은 우성은 명헌의 겨드랑이 아래로 양 팔을 집어넣고 꾸깃꾸깃 몸을 집어넣었다. 가슴팍에 기대어 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명헌은 두 팔을 벌려 우성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우성아. 나는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저도 싫어요…. 우성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평생 너랑 살고 싶어. 넌?”

 

명헌의 물음에 우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제가 형을 불행하게 만들면 어떡해요?” 물었다. 

꿈이 현실이 되면…? 하는 물음이 따라붙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어느덧 코를 훌쩍거렸다. 

 

“형이 또 나한테 실망하면? 나 때문에 형이 또,” 

 

우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목덜미에 젖은 눈을 부비적거렸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고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명헌은 우성을 다독였다. 우성은 명헌의 어깨에 눈두덩을 꾹 누르며

“나는 형 정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속삭였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어. 아프게 하기 싫고 속상하게 하기도 싫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들어주고 싶어요. 사랑하니까…….”

“…….”

“형이 잊으라고 하니까 꿈은 잊을게요. 또 다른 내가 형한테 잘 하라고 경고한 거라고만 생각할게요. 나는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안 할 거야. 정말이예요.”

 

온점 뒤마다 눈물이 찍혔다. 코까지 훌쩍거리며 우성은 명헌을 꽉 끌어안았다. 둘 사이 틈이 없도록 자꾸만 살을 맞대고 팔을 다시 안고 하는 통에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케이스가 우성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성은 눈물 젖은 목소리로 “…근데 이거 뭐예요?” 물었다. 

 

명헌은 우성을 잠시 품에서 떼어낸 뒤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우성은 훌쩍이던 와중에도 “이게 왜….” 당황한 눈치였다. 우성이 준비한 반지지만 청혼은 왠지 제가 하는 듯한 기분으로, 명헌은 반지를 우성의 왼손 약지에 껴주었다. 남은 하나를 가져간 우성이 명헌의 약지에도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건 왜 버렸어?”

“못 주게 될 줄 알고….” 우성은 얼버무렸다. 

 

두려운 꿈을 꾸고 명헌을 위해서라도 이별하기로 마음 먹은 뒤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기억이 났다. 명헌이 미국까지 와 이걸 발견하고 결국 나눠 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똑같은 반지 한 쌍을 보면서도 우성은 아랫입술을 비죽거렸다.

 

“잠깐만 껴요. 더 좋은 걸로 바꿔 줄래. 쓰레기통에 들어갔었던 거 말고….”

 

다시 해요. 형 얼마나 있다가 갈 거예요. 오래 있다가 가면 안 돼요? 같이 반지 맞추러 가요. 같이 골라서 해. 좋은 걸로……. 우성은 연신 종알거렸다. 허리춤에 딱 달라붙어 어깨에 머리칼을 마구 비벼대는 통에 목울대가 간질간질했다. 

 

“우성아, 그만. 간지러워.”

“으응? 간지러워요?”

 

미안. 머리카락 붙었나 봐봐요. 내가 봐줄게. 혼잣말처럼 종알거리며 우성은 명헌의 어깨에 다시 착 달라붙어 얼굴을 부볐다. 명헌은 저항 없이 그저 웃으며 우성을 꽉 끌어안았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날벌레들이 가슴 속에서 마구 파닥이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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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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