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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g on Shoe

w. 공영

@dizzylizzycozy

농구선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아무래도 선수 본인의 몸이다. 그중에서도 손이나 무릎이다. 그들은 연장전 없이 사십 분을 쉴 새 없이 달려야 해서 웬만하면 무릎을 꿇거나 관절을 쓰는 일을 극도로 기피했고, 섬세한 감각으로 공을 다뤄야 하는 손에는 어떠한 상처와 장신구도 허락하지 않았다. 

 

은퇴의 원인은 높은 확률로 전성기만큼 따라주지 않는 기량과 신체며 상견례를 갔을 때 집안 어른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거나 무릎을 꿇어앉지 못해 난처하다는 건 선수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평생 농구공을 만져 온 손이 변함없는 감각으로 공을 드리블하고 슛을 넣기 위해서, 결혼하고도 반지를 끼기를 기피한다는 것도 그랬다.

 

그런 업계에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미국에서 이름 석 자만 대면 스포츠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도 단숨에 알아들을 아시아의 혜성 같은 농구 선수가 손에 반지를 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를 지금의 위치까지 데려다 놓은 농구 생활과 단숨에 맞바꿔도 괜찮을, 아니 오히려 기쁠 미래라는. 매스컴이, 사람들이 왼손 약지에 새겨진 것처럼 또렷한 반지를 보고 그렇게 떠들었다. 

 

정우성 본인도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그 확신에 찬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언하지도 않았다. 질 낮은 타블로이드부터 이름 있는 스포츠 신문까지 떠들어 대는 루머를 정정하거나 반지의 상대를 넌지시 언급하는 대신 그는 늘 침착하거나 가끔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를 비추는 카메라를 바라보았고, 경기가 시작될 때 반지를 경건한 태도로 빼 벤치 위에 내려놓으면서 그게 사랑을 녹여 굳힌 결실쯤 된다는 듯이 굴었다. 

 

그가 농구를 사랑하듯 집요하고 다정하게 사랑하겠지, 코트 위에서 신실해지듯이 한 사람만을 종교처럼 바라보겠지. 보란 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티 내는 행동에 수많은 팬과 셀럽, 동료가 그의 연인을 향한 부러움이나 질투에 못 이겨 거의 뒤로 넘어가다시피 했다. 

 

“좀 더 예쁜 걸로 하자니까요. 우리 예물인데.”

 

- 선수가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너 농구 계속 안 할 거야?

 

“어차피 농구할 때는 빼요. 형도 알잖아요. 봤으면서.”

 

- 그래도. 너무 무거우면 공 만질 때 괴리감 생겨.

 

목걸이로 해 걸면 된다던가, 아니면 라커룸에라도 넣고 잘 잠그겠다고 몇 개씩 제시하는 대안은 명헌의 가드에 속절없이 막혔다. 이제 코트 위에서 뛰는 농구선수는 아닌데도 왜 이렇게 수비가 단단한지, 명헌이 달았던 것과 같은 포인트 가드 포지션으로 농구 코트를 달리는 우성은 그의 고등학생 시절 별명이 ‘수많은 가드를 좌절시킨 전국 최고의 가드’였다는 걸 새삼스레 떠올렸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아요. 형이 최대한 양보한 것도 알고. 그러니까 목걸이로 할 체인은 형이 직접 골라 줘요. 연습이랑 경기 전에 빼는데 잘못하면 잃어버리게 생겼다니까. 매번 반지 주고받은 케이스 들고 다니면서 보관할 수도 없잖아요.”

 

- 음. 우성, 곧 한국 들어오지.

 

“네, 잠깐 경기 일정이 크게 뜨더라고요. 휴가도 쓰기로 했어요.”

 

- 그러면 그때 같이 보러 가. 비행기 날짜 정해지면 얘기해 줘. 

 

좋아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우성이 수화기 너머로 보내는 짤막한 입맞춤과 쾌활한 인사를 끝으로 국제전화를 끊었다. 프로 선수가 돼서 좋은 점이라면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열네 시간쯤의 시차와 지구 반 바퀴를 넘어 원하는 만큼 통화할 수 있다는 점일 거라고 생각하며, 오므린 입술로 부는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발랄했다. 

 

에이전시와 협의한 출국 일정은 머지않아 잡혔고, 우성이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한다며 공항 게이트 앞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도 카메라와 팬들을 향해 인사할 때 기자들은 여전히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에 초점을 맞췄다. 저 사랑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과연 기대하던 것처럼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아슬아슬하게 농담과 악담을 넘나드는 기사의 타이틀은 덤이었다. 과도하기까지 한 짓궂음에 우성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노 코멘트. 내 사랑은 견고하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처럼 순순히 불행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재미없죠. 사랑은 원래 그래요. 우아하고 어쩌면 오만하기까지 한 태도는 에이스가 취하기에 아주 정당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조금 넘는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우성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곧 있을 경기에서의 실력 발휘가 의심될 정도로, 늘 반들거리는 축이었던 건강한 안색이 제대로 죽어 돌아왔다. 나갈 때와 마찬가지의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렸는데도 체격이 숨겨지는 건 아니라서 사람들은 공항의 밀려드는 인파 가운데서도 그를 귀신같이 찾아냈고, 출국 전의 환한 얼굴과 비교해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없다.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살던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파혼인가? 단순하게 잃어버린 건가? 그냥 반지 잃어버린 사람이 세상도 잃어버린 얼굴을 하나? 온갖 스포츠 매체와 가십지는 다른 의미로 시끄러웠다. 성별도 나이도 이름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우성의 연인을 두고 온갖 추측이 다시 한번 난무했다. 그리고 우성은 들이미는 마이크에는 침묵을 지키고, 사생활에 대한 선도 없이 플래시를 터트려 대는 파파라치 카메라에는 여전히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문 모습만 보여 주었다. 대신 벤치에서 코트 위로 올라서기 전 그가 꾸준히 해 오던 일련의 행동들이 사라졌고, 그는 하프 타임이나 경기가 끝난 후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 가끔 왼손 약지가 허전한 것처럼 손가락을 매만졌다. 사랑을 잃은 듯한 남자는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 그러니까요, 제가 비행기 탈 때까지만 해도 손에 끼고 있는 거 알았는데. 미국까지 가는 데 열네 시간이잖아요? 중간에 잠 좀 자다가 여권 챙기고 내리려고 하는데, ……반지가 없어졌어요.

 

그러면서 그는 수화기 너머로 굉장히 허둥대고,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비행기 안을 몇 번이나 뒤지기도 했고 혹시 다른 짐에 섞여 들어갔나 싶어서 집에 오고 나서는 짐을 전부 풀어놓아 찬찬히 뒤져 보기도 했으며, 지금 한국에 들어가 있는 송태섭에게 혹시 모르니 공항 쪽의 분실물도 확인해 봐 달라고 했다면서. 얼마나 고심해 맞춘 반지인데 잃어버려서 미안하다고 몇 번쯤 말하는 목소리가 푹 죽어 있었다. 잠에 들기 직전의 명헌은 핸드폰 너머로 우성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지금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크고 헐렁한 반지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명헌이 우성을 공항에서 배웅하고 거의 정확히 열네 시간쯤 지나자 해외 스포츠 신문 포털에는 모자와 마스크를 갑갑할 정도로 갖춰 쓴 우성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떴다. ‘피앙세fiancée’에게 차인 건지, 그가 찬 건지를 추측하는 우스운 타이틀도 함께였다. 일주일 동안 비밀에 부쳐진 그의 일정에 대해 전부 추측에 불과한 소설을 써 내려간 기사를 명헌은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재미도 없어서 곧 창을 껐다. 우성은 그냥 반지를 집에 놔두고 간 것뿐이다.

 

반지를 꼈다 뺐다 하면 그 무게감에 익숙해질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금속이라 가벼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우성은 농구를 하느라고 손을 더욱 민감하게 유지해야 하는 선수라 더욱 이질감이 컸을 게 분명했다. 명헌은 손쉽게 짐작했다. 농구공을 직접적으로 만지지도 않고 한 번 끼고 난 후 씻을 때조차 뺀 적이 없는 명헌도 아침에 일어날 때 손가락이 무겁다는 사실을 낯설게 깨닫고는 하는데, 매번 빼고 다시 끼면서 적응할 시간이 없는 그는 더할 거라고.

 

“우성, 걱정하지 마. 나한테 있다, 뿅.”

 

- ……반지가요? 우리 반지? 그게 명헌이 형한테 왜 있어요?

 

“내 집에 놔두고 갔던데. 너 한국 왔을 때 여기서 지냈잖아.”

 

- 그랬죠. 근데 내가 거기, 설마 씻다가? 

 

“아마도. 씻으러 들어갈 때 협탁 위에 올려놨나 본데. 거기서 찾았어.”

 

우성이 짧게 앓았다. 분명 골치가 아프다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공항에서 분명 끼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는 투정 같은 말도 함께 들렸다. 뺨에 핸드폰을 대고 잠에 들락 말락 하던 명헌이 낮게 웃었다.

 

“목걸이 체인까지 샀는데. 그것도 놔두고 갔고, 우성.”

 

- 어쩐지 허전하더라. 나 좀 덜렁거리네요. 

 

“쉬러 들어왔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택배로 부쳐 줄게. 한두 주 안이면 다시 받을 수 있을 거야.”

 

- 응, 택배로……. 아니다. 있잖아요, 형이 와 주세요. 비행기 티켓은 내가 끊을게요. 

 

“얼굴 본 지 얼마 됐다고.”

 

- 그래도 보고 싶어요. 안 될까요, 명헌이 형. 형이 나 경기 뛰는 거 봐 줬으면 싶기도 하고, ……슬슬 이 사람이 내 애인이라고 티 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결혼해도 비밀 유지는 해주는 것 아니었나. 일단 회사 일정 좀 보고.”

 

핸드폰을 들 힘도 없는 명헌이 노곤한 목소리로 애매한 대답을 했다. 정말로 휴가 얻어서 한참 같이 지내다 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보러 와 달라고 조르는 게 조금 난처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명헌은 그래도 그가 선수로 뛰는 미국에 오랜만에 찾아가 보고 싶기도 했다. 솔직히 십 년쯤 타국에 애인을 두고 일 년에 많아 봤자 한두 번 만나다시피 했으면 얼굴을 보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더라도 보고 싶은 게 당연했다. 갈팡질팡한 마음을 알았는지 우성은 더 보채지 않고 출근을 앞둔 명헌을 재웠다. 잘 자요, 형. 나 경기 잘할게요.

 

명헌이 잠들어 있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 치러진 경기는 우성이 속한 팀의 승리로 끝났다. 자고 일어나서 경기 결과를 확인했을 때, 꽤 괜찮은 어시스트 비율을 기록했다며 산산이 조각난 사랑도 그의 패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진부한 기사가 판을 쳤다. 미국에서 농구를 시작한 것도 이제 십여 년쯤 돼 갈 텐데 명헌이 보기에 그들은 아직도 우성을 몰랐다. 정말 헤어졌어도 그는 경기에는 지장 가지 않게 굴었겠지만 일단 대전제가 틀렸다. 정우성은 잡은 공을 패스하면 패스했지 놓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패스를 받는 건 더 잘했다. 

 

 

 

 

* * *

 

 

“구단 쪽에 자리는 좋은 데로 해 달라고 말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코트랑 많이 멀지는 않을 거예요.”

 

“응. 가서 볼게.”

 

“그러면 저 준비하러 먼저 가요, 형. 나중에 봐요!”

 

다른 사람 모르게 명헌의 뺨에 짧게 입맞춤을 남긴 우성이 관계자 통로로 멀어져 갔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그때 장거리 비행을 견딜 이유로 꼽았던 경기를 보겠다는 핑계, 반지와 목걸이 끈을 전해 줘야겠다는 핑계, 날짜도 정하지 않았고 자세한 얘기가 오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결혼 상대로 점찍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한 번쯤은 앞에 나서야 하겠다는 의무에 가까운 핑계가 전부 녹아 없어졌다. 그냥 저렇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두어 번 손을 마주 흔들어 준 명헌이 티켓을 쥐고 시작 시각보다 일찍 경기장에 들어갔다. 벌써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넘버 나인, 우성 정.  그를 맞이하는 호응이 코트를 뒤흔들 것처럼 컸다. 명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좋은 자리를 주겠다더니, 정말로 시야가 훤해 코앞에서 선수들이 뛰고 있었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우성이 조깅하듯이 가볍게 뛰어나오는 것 역시 잘 보였다. 아대는 끼지 않았고, 머리 한쪽에 자그맣게 낸 스크래치와 더 커진 덩치가 변한 점이라면 변한 점이었다. 휘슬과 함께 양 팀이 하프라인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곧 점프볼이 높게 떴다. 상대 팀이 공을 먼저 받았다. 인사처럼 강렬한 플로어 슬랩으로 경기의 포문을 연 그는 정교한 움직임으로 공을 빼앗아 팀의 빅맨에게 패스를 보냈다. 요란하게 쑤셔 넣어진 덩크로 그의 팀이 선취점을 가져갔다. 

 

명헌은 턱을 괸 채 영상 속의 우성과 눈앞에서 뛰는 실제 모습을 비교했다. 경기를 끌어가는 기세가 좋았다. 구김살 없고 속도감 있는 성정의 우성이 팀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포인트가드가 되어서인지 팀 자체의 흐름은 경쾌한 편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속도감 있는 런 앤 건을 장기로 하는 팀은 아니어서, 공은 선수들의 손을 복잡하게 오가며 자꾸 부딪쳤다. 그런 철벽같은 수비를 뚫고 득점이 날 때마다 긴 환호가 터졌다. 

 

슈팅가드, 포워드, 포인트가드. 덩크, 더블 클러치, 레이업과 파울. 공의 궤적을 쫓기 위해 기록지라도 들고 경기를 관전해야 할 판이었다. 긴장감 있는 1쿼터를 흘려보내며 우성은 코트 위의 사령탑답게 팀원들에게 꾸준히 말을 했고, 공을 보냈으며, 코트를 넓게 보았다. 아직도 그는 명헌이 보내는 패스를 받아 득점하는 에이스일 것만 같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2쿼터가 끝나고 하프 타임이 선언됐다. 심판이 다시 휘슬을 불었고 선수들은 헐떡대며 각자의 벤치로 돌아갔다. 성향이 비슷해 상성이 맞지 않는 팀과의 경기였다. 오늘따라 유독 더 흐름이 엎치락뒤치락해 간신히 점수를 리드하고 있는 우성의 팀도 고전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경기가 풀리고 말고와는 별개로 명헌은 우성에게 전해줄 것이 있었다. 다른 적당한 때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지금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성, 이리 와 봐.”

 

“명헌이 형? 무슨 일인데요?”

 

우성이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다가왔다. 코트 위를 걷는 발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명헌이 관중석에서 코트 바닥으로 내려왔고 여전히 짧은 머리를 한, 그러나 기억하던 것보다는 훨씬 커진 우성의 앞에 스스럼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지하지 않는 우성과 관계자의 반응에 관중들이 곧장 웅성거렸고 명헌은 늘 그랬듯이 그런 소요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눈앞에 놓인 하나에만 집중했다. 그가 고개를 조금 들고 올려다보면 머리 뒤쪽에서 농구 코트의 환한 조명을 받는 여전히 소년 같은 얼굴이 보였다. 말없이 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던 그가 엄지에 끼고 있던 우성의 반지를 뺐다.

 

뭘 하려나 싶어 그가 가만히 한쪽 발을 내주고 바라만 보는 가운데 명헌은 그가 꼼꼼하게 묶었던 신발 끈을 풀어내고,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구멍 두 개쯤 풀려 느슨해진 끈에 다시 걸었다. 조금 큼지막한 은색 링이 발등 위에서 반짝거렸다.

 

“이러면 안 잃어버리겠지. 농구공을 만지는 데도 거슬리지 않을 거고.”

 

잠깐 우성을 바라보던 명헌이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끈을 다시 꿰었다. 농구공을 만질 테니 손에 낄 수도 없고, 목에 걸자니 오래 뛰어다니면 가슴팍을 때려 아플 거였다. 그런데도 몸에 계속해서 지니고 싶다면, 최소 사십 분 동안 벗을 수도 없는 신발에 걸어주는 수밖에.

 

디자인도 두 사람이 함께 골랐고, 끼워주는 것도 어느 한쪽의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마주 앉아 교환한 반지라 두 사람에게 있어 프러포즈라는 하나의 의식이 가져다줄 놀람이나 떨림은 덜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릎을 꿇고 네 번째 손가락 대신 신발 끈에 반지를 끼워 주면서 명헌은 꼭 어리고 다정한, 농구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할 애인에게 다시 청혼하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럴 때 영원을 약속하고 약속받는다지만 명헌은 조금 다른 걸 바랐다. 그러니까, 정우성이 이 얇고 작은 반지를 생각보다 더 무겁게 느끼기를. 신발 끈에 걸린 게 농구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딱 신경이 쓰일 정도로 낯설어서 이 순간을 한참 생각하고, 단순한 반지 그 이상으로 여기기만을. 

 

구멍에 끈을 다 꿴 명헌의 곧은 손가락이 능숙하게 매듭까지 묶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가 부원들에게 가르쳐 주곤 하던 방법이었다. 이대로 묶으면 사십 분간 풀코트를 뛰어도 탄탄해서 오히려 도로 풀고 신발을 벗어야 해, 뿅. 지금처럼 무릎을 꿇은 채, 눈동자를 마주치면서. 손쉽게 입에 올리는 영원이라는 말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고 싶다. 그가 농구를 사랑할 때 짓는 표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엄지에 끼고 있던 우성의 반지를 더듬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머나먼 곳에서 둘만 아는 방식으로 청혼했다. 

 

멀리 돌아가지 않는 시선이 또렷했다. 여전히 어리고 반짝거리는 구석이 우성의 동그란 눈에는 있었다. 명헌은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새삼스럽게 그것을 발견했다. 

 

“형 무릎 아프잖아요. 그냥 끈에 매라고 하고 나 주지. 경기 끝나고 하면 되는데.”

 

“나는 이제 선수도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꿇는 것보다는 나아.”

 

“그래도요.”

 

“해 주고 싶어서.”

 

우성의 손가락이 조금 길어진 명헌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땀에 푹 젖은 얼굴이 상냥하게 웃었다. 사랑하니까, 하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모두 안다는 표정이었다. 늘 들킨 기분이고, 늘 휩쓸려 사랑하는 것 같은 마음 가운데서 그를 유일하게 붙들고 살게 하는 애정의 증거였다. 세상의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 오로지 사랑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저 얼굴만 있다면. 긴 연애는 만남 초기에나 찾아들던 불안을 흔적도 없이 쓸어간 지 오래였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느리고 단단한 사랑이 전부였다. 깔끔하게 마무리를 끝낸 명헌이 일어서며 무릎을 몇 번 털었다. 그리고 우성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더니 관중석으로 돌아갔다. 하프 타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우성.”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난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명헌이 그를 불렀다. 네, 명헌이 형. 지친 기색이 없는 우성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명헌은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마저 경기를 잘하고 오라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주어 당부하지 않아도 그는 자기 할 일 하나쯤은 똑바로 해낼 줄 아는 애고, 그런 모습은 명헌과 우성이 고등학생일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또 명헌이 농구를 관뒀다고 해서 경기 관람까지 관둔 건 아니었고 그는 여전히 코트를 넓게 보고 읽었다. 우성이 얼마나 깔끔한 패스를 성공시키는지, 틈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흐름을 잘라내 자기 팀의 것으로 잇는지가 보였다. 포인트가드 포지션을 물려받다시피 한 산왕의, 내 에이스. 명헌은 손바닥 살이 눌리도록 난간을 쥐던 것을 놓고 등을 세웠다. 한 사람만을 쫓는 시선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았다.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 경기에서 집중하는 법을 배운, 쉽게 뿌듯해 하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명헌이 우성을 구태여 불렀을 때 그는 이유도 모르지만 손바닥으로 그 어린 뺨을 덮어 만져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명헌은 관중석으로 올라왔고, 코트와 관중석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명헌은 더 이상 그가 뛸 경기 속 포인트가드는 아니겠지만 끊임없이 패스를 건넬 자리에 설 유일한 사람이 돼 주고 싶었다. 농구공이 아니라 다른 패스를 건네고 싶었다. 엄지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대면서, 이런 걸 잃어버렸다거나, 그래서 한참 울고 초췌해진 애인을 보고 가십지 속에서 깨졌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하는 얼굴 없는 주인공이 되는 일 따위는 이제 모두 상관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명헌의 말을 기다리던 우성이 평소의 그처럼 장난기 있게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을 하고서는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그가 받아 왔던 말끔한 패스에 대한 찬사를 보내듯이 명헌을 가리켰다. 자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세리머니에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가 희미하게 웃은 명헌 역시 우성의 득점을 칭찬하듯 똑같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패스를 건네고, 또 그걸 성공적으로 받아 안고. 고작 일 년 하고도 반, 같은 코트에서 공을 보내고 받던 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지금도 생생했다. 한 팀이 해낼 수 있는 농구의 정점이 산왕에 있었고 그의 손에서 시작되는 패스를 득점으로 연결하는 가장 최선의 조합을 만들어 내며 어디 있는지도 모를 농구의 끝을 좇았다. 흘린 땀방울과 갈아치운 운동화가 어린 시절들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경기에서의 득점은 중요했다. 팀이 이기기 위해서는 점수가 나야 했다. 그런 면에서 에이스 정우성은 포인트가드 이명헌에게 있어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그보다, 진심으로 던진 패스가 엇나가지 않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정우성은 다시, 이명헌의 최고의 파트너였다. 

 

“사랑해.”

 

뚜렷한 입 모양, 그리고 온갖 소음을 뚫고 들리는 단 한마디에 우성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국조차 남지 않은 왼손 약지 위에 입을 맞추며 명헌에게 대답했다. 나도요. 

 

새 쿼터가 시작됐고, 우성은 짧은 머리카락을 쓱쓱 문지르면서 코트 위에 올라갔다. 변하지 않는 긴장과 떨림, 그러나 그날의 경기를 향한 기대와 설렘이 혼종했다. 실력을 믿고 운영 능력을 믿는 것과 별개로 그가 평생 함께해 온 농구는 늘 넘어설 벽이고 사랑하는 대상이었으며, 그와 내일도 함께할 것을 믿었다. 

 

코트 위에서 이루어지는 포인트가드의 패스는 대부분 같은 팀의 에이스에게 돌아갔다. 공만을 쫓으며 경기에 집중하다가 득점에 성공하고, 팀원과 쇼맨십을 보이다가 잠깐 고개를 돌리면 잊지 않고 마주치는 눈동자가 선명했다. 그때 우성은 공을 떠나보내 비어 있는 가슴팍이 도로 묵직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명헌이 코트 한중간을 꿰뚫으며 패스를 보냈고 그걸 똑바로 받을 수 있는 건 이명헌의 파트너 정우성이 유일했다.

 

아직 3쿼터와 4쿼터, 그리고 어쩌면 연장전까지도 남아 있다. 내일도 경기가 있고, 사흘 뒤에도 또 있다. 농구가 끊임없이 그의 삶을 두드리듯이 그가 받아 안은 사랑도 꾸준히 다음을 향해 이어진다. 

 

온건한 사랑은 원래 스릴이 적고 재미없는 편이다. 농구를 향한 애정이 그랬고 명헌을 향한 사랑이 그랬다. 우성이 등을 구부려 땅땅한 허벅지와 종아리 뒤를 늘이면서 일부러 밧슈에 걸린 반지를 만졌다. 손가락에 걸렸다가 빠져나가는 반지는 꼭 저기 서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처럼 단단하고 반짝거렸다. 

 

그는 이 경기가, 이 사랑이 승리로 끝날 것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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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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