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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혼 선 언 문

w. 뭄

@mum_sannoh

채광 좋은 침실에 햇빛이 아른거린다. 하필 명헌의 얼굴 위로 드리운 강한 빛에 한창 연하 애인에 시달린 후 기절하듯 잠에 든 명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몸을 움직이려 바둥대도 명헌을 꽉 안은 정우성의 우람한 몸집에 낑낑대다 결국 포기하고 힘을 뺐다. 자기를 안고 있는 연하의 남성을 흘기며 명헌은 이 남자가 어떻게 나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다사다난했던 이야기들이 마구 떠오른다.

 

-

 

명헌이 연하 애인을 만나기 위해 대륙을 건널 때에는 무조건 이코노미 좌석을 이용했다. 가난한 대학생일 당시엔 그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그때당시에는 이코노미석 외의 상급 좌석들은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다. 마치 저 포도는 실 거라 단정하는 여우가 되어, 조금 불편하더라도 미국으로갈 수 있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왔다.

 

대학 리그에서 부진했던 우성이 다시 제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명헌은 180의 길쭉한 몸을 한껏 구겨 이코노미 좌석을 타고다녔다. 우성은 싱글 하우스를 마련한 후, 명헌이 형이 우리 집 첫 손님이 되면 좋겠어요. 하며 은근히 명헌의 미국 방문을 종용했다. 우성의 간절한 눈빛에 그날 저녁 바로 좌석을 예매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새벽이 한참일 시간대의 미국에 도착한 명헌은 구태여 우성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우버를 켜 택시를잡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택시를 잡는 데에 20분이 넘어가자, 그냥 우성을 깨울까 고민했다. 그런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건지 금방 기사가매칭됐다.

 

명헌은 택시를 기다리며 공항 입구의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시 사진 앱을 켰다. 곧 만날 사람인데도 우성의 사진들을 보면 왠지 뭉클해지고 외로웠다. 94번째 우성의 사진을 보던 와중, 기사의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말투가 특이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억양이 특징적이었다. 명헌 짧은 영어로 더듬거리며 말을 잇자, 오케이, 오케이를 연발하며 사람 좋은 목소리로 곧 도착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금방 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검은색 차량이 명헌이 서 있는 1 게이트 앞에 섰다. 앉았던 몸을 일으켜 제 짐보다 우성에게 줄 것이 많은 캐리어를끌고 택시로 걸음을 옮겼다. 명헌의 인영이 가까워지자, 기사가 문을 열고 명헌을 반겼다. 웰컴 투 유에스에이! 그은 피부에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명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기사는 부러 명헌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색하게 호응해 준 후에 캐리어에 대해가르치니 무거운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명헌은 뒷좌석에 앉아 지친 몸을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댔다. 팔을 꼬고 눈을 감고 있자니 기사는 별말 않고 핸들을 잡았다. 이래서 우버가 좋았다. 굳이 기사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혹시 우성의 집에 가는 내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어쩌지? 명헌의 영어 울렁증을 자극할까 봐 지레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무색할 만큼 기사는 말이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인 줄 알았는데 사진으로만 본 집의 모습이 보였다. 기지개를 켜며부스럭대자, 기사는 도착했다며 뒤를 돌아 활짝 웃으며 말한다.

 

땡큐. 기사는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캐리어를 꺼내주며 우버 앱에 리뷰 하나만 남겨달라며 넌지시 요구했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말이 길어지는 게 싫었다. 명헌은 어서 우성의 품에 안겨 족히 10시간은 넘게 잠들고 싶었다.

 

차에서는 한 마디도 걸지 않더니 후기를 쓰라는 말을 많이 하려고 참았던 걸까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아이 윌. 제발 말 좀 그만 걸어라. 명헌은 등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짧은 영어와 영어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미간을 힘껏 구기자 눈치를 보던 기사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바이 바이. 손을 흔드는 기사가 점점 멀어졌다. 명헌은 우성이 전에 알려준 비밀번호를 눌렀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쉽게 열렸다.

 

명헌을 처음 반겨준 건 가지런하게 놓인 농구화들이었다. 꽤 단정한 집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나 단정한 것과는 별개로 어딘가 외로움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명헌은 급히 신발을 벗고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욕실에 들어갔다. 맘속으론 당장 우성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은근히 깔끔 떠는 우성의 모습이 떠올라 급히 몸을 씻고 가져온 홈웨어를 입은 다음 집 안을 살폈다. 가끔 화상 통화를 할 때 침실을 본 적은 있으나,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몰랐던 명헌은 잠시 헤매며 이리저리 집을 살폈다. 잠시 멀뚱히 서서 고민하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손이 뻗어 나왔다. 어, 어.

 

“형......?”

“나때매 깬 건가용.”

“이거 꿈인가...”

“꿈이에용.”

 

작게 웃으며 진짜 꿈이라고 거짓말하는 명헌에게 우성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꽤 많이 자란 머리를 쓸어내리더니 이내 양손으로 제 볼을 세게당겼다.

 

“아, 악!”

“바보용.”

 

이거 꿈이 아닌가 봐요. 울컥한 얼굴로 명헌을 세게 끌어안는다. 나 죽어요오옹. 너무 강하게 껴안아진 명헌이 절규 아닌 절규를 내뱉었다. 우성은아직 축축하게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뽀뽀했다.

 

“저 형... 진짜 보고싶었어요...”

“나도용.”

“나만큼 보고 싶어 했어요?”

“확신해용.”

 

아 너무 좋아! 190을 훌쩍 넘긴 남자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까 기사에게도 들었던 말을 우성도 내뱉었다.

 

“Welcome to USA!”

“발음 굴리는 거 하나도 안 멋져용.”

“본토 발음이라 그래용.”

“왜 말 따라해용?”

“귀여워서용.”

 

이래도 귀여워? 우성의 손을 잡아 제 가슴팍에 올렸다. 두툼하게 올라붙은 근육이 움찔댔다. 해사하게 웃던 남친은 어디 가고, 깊은 눈으로 명헌을바라보는 남자만 있었다. 자연스레 우성의 목에 제 팔을 두른 연상 애인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그런 애인을 번쩍 들어 침실로 향했다. 둘의재회는 길고, 짙고, 끈적했다.

 

신나게 붙어먹은 다음 날, 놀랍게도 신명 나게 싸움도 났다. 우성이 명헌의 짐을 정리하던 중 이코노미 좌석의 티켓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성은내가 이제 돈 보내줄 테니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로 탔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넸는데 거기에 바로 순응한다면 그건 이명헌이 아니었다. 명헌은내가 네 돈을 받는 건 싫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우성은 연인 사이에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둘 중 하나라도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싸움으로 번질 일은 없었다. 결국 명헌은 미국에 온 지 이틀 만에 게스트룸에 틀어박혔다. 정우성 망해라. 속으로 저주하며 목까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베개와 이불만 있다면 어디든 자는 명헌의 속편한 성격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그는 5분도 되지않아 잠에 들었다.

 

한참 무아지경으로 잠을 자던 와중에 눈앞에 어른거리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서서히 잠에서 깬 명헌은 그 남자가 소리를 죽인 채 서 있다는걸 바로 알아챘다. 비참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내는 남자가 명헌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우성아, 일단...”

“잘못했어요... 다신 욕심 안 부릴게.”

 

아예 명헌의 손을 잡고 아래로 쭉 미끄러진 우성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파 와 명헌도 같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덜덜떨며 잘못했다고 비는 우성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이명헌은 등을 꽉 껴안으며 내가 미안해, 울지마, 좋아해, 사랑해, 울지마, 제발... 애원에 가까운 말소리에 점점 물기가 차오른다. 지금까지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두 사람은 조심스레 서로의 말을 꺼냈다.

 

우성은 만성적 외로움을, 명헌은 과도한 불안감을.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이 지금까지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롯이 두 사람의 배려심에 기인한 것이었다. 우성은 훌쩍이며 저 이제 돈 잘 벌어요... 저 진짜 괜찮으니까, 형이 자주 와줬으면 좋겠어요. 라며 말을 이었다.

 

한껏 주눅이 든 얼굴에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다시 한번 우성의 깊고 어두운 외로움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명헌은 잠시 멈칫했다. 명헌도 이제 우성과 떨어지기 싫었다. 이미 피가 섞인 가족들에게 쏟는 애정과, 정우성에게 쏟는 애정의 무게를 잰다면우성 쪽이 더 무거울 것이다. 깊어진 마음은 계속해서 커졌고, 멀리 떨어진 이라는 페널티는 오히려 두 사람의 애틋함을 키우는 장점이 되었다. 한참 말이 없는 명헌에 우물쭈물하던 우성이 사과한다.

 

 

“형, 제가...”

 

“우성아.”

“우리 결혼할까?”

“네?”

“결혼할래용?”

 

어벙한 얼굴로 말문이 막힌 우성의 뺨을 쭉 늘렸다. 악! 외마디 비명에 명헌이 부스스 웃었다. 이른 새벽의 달빛이 스며든 침실 안에 앉아 평소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연상 애인의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았다. 우성은 들어갔던 눈물을 삐죽 흘리며 울면서도 헤헤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용”

“괜찮아요. 뿔... 멋있으니까?”

 

축축해진 우성의 뺨을 손으로 훔치며 말랑한 볼의 촉감을 만끽했다. 귀엽다. 고작 1살 차이인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는 걸까. 그래서 답변은용? 꽤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 이명헌에 우성은 크게 소리쳤다.

 

!

 

우렁차네용... 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던 명헌이 우성을 침대에 앉혔다. 영문도 모르고 침대에 걸터앉은 우성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평생 우성만을 사랑하겠어용.

우성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겠어용.

행복하게 해줄게용.

 

“우,”

 

으헝...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금방 운다니까용. 물론 그런 우성도 사랑해용. 물론 당장이라도 결혼하자는 말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결혼이란 든든한 빨간 끈을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꽉 묶었다. 거기다 명헌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이 이상 우성을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은마음과 마음껏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마구 섞인 감정을 앞세워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기로 정했다.

 

워낙 불도저 같은 성격인 이명헌을 잘 알고 있는 우성도 엄청난 실행력에 감탄했다. 명헌이 미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우성은 과도하게비싸고 대단히 많은 물품을 구매했다. 처음엔 질색하며 이거 환불하고 와용. 했지만 기어코 명헌의 손에 쥐어주는 우성이 귀여워서 이후론 다 받아주고 기쁜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둘이 매일 로맨스만 찍은 건 아니다. 미국의 거대한 바네글자 선생님이 둘의 보금자리에 나타났을 땐 스릴러, 명헌이 같은 일본인 유학생과 저녁을 먹고 온 날엔 치정, 명헌이 아끼는 돌멩이를 (애초에 비싼 돌이 아니었다. 그냥 명헌의 눈에 띈 하찮은 돌멩이였다) 그저 정원의 돌멩인줄 알고 명헌이 일부러 얌전히 나무 밑동 사이에 놓았던 걸 정원 정리를 하면서 버린 날엔 호러를.

 

아주 지지고 볶던 두 사람은 둘의 기나긴 협정을 통해 국내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우성은 MVP라는 엄청난 자리를 세 번이나 차지했다.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받았지만, 우성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결국 이 넓은 미국에서 자신은 이방인에 불과해서. 그나마 지금껏 버텨온건 모두 사랑하는 연상 애인덕분이었다. 생각을 마친 우성이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명헌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이 영광을 세 번 겪을 동안, 명헌이 마냥 손 놓고 우성과의 연애에만 집중한 건 아니다. 스포츠 지도자 자격증과 스포츠 과학 관련 논문을 작성하느라 죽을 만큼 바빴다. 심지어 둘 다 매우 바쁠 때는 2주 정도 얼굴을 못 볼 때도 있었다. 명헌은 피나는 노력으로 석사학위를 따냈고, 교수로부터 박사과정을 권유받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우성의 노트북에서 일본 동성혼 따위의 검색어들을 봤기 때문이다.

 

명헌은 우성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꺼낸 날, 숨겨놨던 은반지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 순간을 정우성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예스를 남발하는 우성에 자꾸 영어하지마용, 나 영어 울렁증 있어용. 하며 괜스레 장난스레 말했다. 명헌은 영어 울렁증을 고친지꽤 되었지만 구태여 말하기 어려웠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와 학회 세미나, 그리고 우성이 경계하는 동양계 유학생들과 소통하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낯선 이방인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 울렁증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우성의 옆에 서기 위해, 얘의 버팀목이 되고 싶어서. 

 

이제 명헌은 옆집 할머니의 호들갑에 능청스레 장난치는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굳이 울렁증이 있다며 말한 건 혹여 우성이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낄까 봐 그랬지. 물론 우성도 그런 명헌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입을 꾹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혼인신고. 일본은 동성혼이 허락되지 않기에, 귀국하기 전에 어서 혼인해야만 했다. 다급한 얼굴로 우리 혼인신고 해야 해요! 맞아용! 하고 허둥거리다가, 이 상황이 웃기고 행복해서 둘은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다.

 

그 길로 두 사람은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장 빨리 결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번갯불에 콩 볶듯 뉴욕에 도착하자마자서류를 제출하고 서약식을 치렀다. 멋진 연회장, 멀끔한 양복, 많은 사람의 축복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둘은 두 사람만으로 완벽하기에.

 

그래서 두 사람은 항상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며,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든든한 파트너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로서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했다. 완연한 6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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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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