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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lory of Divorce

w. 익명

왜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짝짓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태어난 것인가. S기업의 3대 독자 정우성은 청담동의 한 스시집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앉아있었다. K-재벌로서 드라마에 나올 법한 온갖 망나니 짓과는 거리가 먼 정우성이었다. 문란한 사생활은 커녕 열심히 공부하고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서클로 즐긴 농구에 깊게 빠진 나머지 기업을 물려받지 않고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폭탄 발언을 선언한게 전부였는데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실신을 하고 허겁지겁 H기업과 합병을 위해 맞선을 만들었다. 워낙 NBA 광팬이었던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우성의 폭탄 발언을 지지하려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한건 필요없는 이야기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 안 들어오는건데."

 

상대는 H기업의 이명헌. 3녀 1남의 1남이었다. 따라서 계열사 하나만 운 좋게 물려받아도 팔자 핀 인생이었는데 이명헌 본인조차 가업을 물려받을 의지가 없다고 냅다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씨 집안은 가업을 물려받을 의지 없는 막내 아들을 S기업의 정우성과 혼인을 성사시켜 합병의 도구라도 사용해보고자 한건데.... 정우성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휙휙 넘기며 생각했다. 

 

"막내 아들이면 경영 공부도 그다지 많이 안했을테고... 집안에서도 그냥 계열사 하나만 명의로 넘겨도 괜찮을텐데 무엇하러 긁어부스럼을..."

"안녕하세용."

"앗쒸, 깜짝이야!"

"저도 만나서 반가워용."

 

인기척도 없이 스르륵 문을 열고 나타난 이명헌 때문에 첫인상부터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건 글렀지만 사실 그건 정우성이 알 바 아니었다. 주책맞게 놀라는 모습을 보고도 명헌은 차분하게 인사한 뒤 우성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 사람 뭐야?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을때 미닫이 문을 열고 직원이 나타나 주문을 받았다. 2인 정식을 시키고 우성은 뭐라 건넬 말이 없어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명헌도 마찬가지로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차를 마셨다. 사진에서 보던 모습보다는 훨씬 부드러웠으나 반대로 예상보다 더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가 뿜어져나왔다. 어쩌면 이거 꽤 괜찮을지도?

 

정우성은 할아버지가 실신해 등 떠밀려 맞선장소에 나왔으나 순순히 협조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명헌에게 개망나니 외동아들로 보여 호감도를 완전히 떨어뜨리고 이런 엉망인 사람과 엮일 바엔 계열사를 하나 물려받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리하여 S기업의 주식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뭐 알 바냐. 정우성은 대가리가 꽃밭이었다. 나는 미국에 가서 농구를 하고 싶다고!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정우성이라고 합니다."

"이름이야 피차 다 아는 사이인데 굳이 통성명까지 할 필요 있나용."

 

윽, 말하는 싸가지. 그래도 잘됐다. 이 사람도 날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 할아버지, 미안해요. 이 합병에 주식이 걸려있다고 하지만 전 제 인생이 중요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우성은 대가리 꽃밭이었다. 대기업 3대 독자로 태어나 준법정신 지키며 살았다고 해도 부족한 것 없이 산 녀석이 무엇이 모자르고 무엇이 필요한지는 전혀 몰랐다. 그리하여 자수성가해서 차곡차곡 집안의 기반을 다진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혈압이 오르고도 쓰러질 무엄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할 말이 없어진 정우성은 입술을 비죽이며 2인 정식만 기다렸다. 그동안 이명헌이라는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얄밉게도 차만 홀짝거렸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문이 드르륵 열렸다. 이 정적을 깨는 가장 반가운 소음이었다. 검은색 일본식 쟁반 위에 정갈하게 플레이팅된 일식이 정우성과 이명헌 앞에 올라갔다. 그럼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하고 직원이 문을 탁 닫고 나갔다. 한 젓가락 뜨려던 그때. 

 

"저는 우성이랑 이혼할 생각이에용."

"예?"

밥부터 먹고 그런 얘기를 하시지. 젓가락으로 잡은 광어회가 접시에 철퍽,하고 힘 빠진 소리를 내었다. 

 

 

3녀 1남중의 1남, 3명의 누나 밑에서 자란 이명헌은 부유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이 얼마나 부유한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다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특별히 욕심도 없었다. 부모님의 말에 따라 경영 수업을 착실히 받았다. 단 한번도 탈선할 생각은 없었다. 중학생 또래 친구들이 담배며 각성제며 몰래 들고와 키득거릴 때도 명헌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비서에게 비눗방울이나 하나 사달라고 했다. 원하는게 있으면 뭐든 다 과분할 정도로 받는데 굳이 하지 말라는걸 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그러던 어느날, 이명헌에게도 하고싶은 것이 생겼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명헌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은 사랑이었다. 

 

 

"우성군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가 본데, 이 결혼 쉽게 무를 순 없어용."

"무, 무른다니. 무슨 소리세요."

"얼굴만 봐도 딱 알아용. 뻔하죵. 맞선 깽판 놓고 결혼 없던 일로 만들 셈이었잖아용."

윽. 이렇게 쉽게 간파 당하다니. 우성의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그럴 순 없어용. 그래서 우리는 결혼해야 돼용."

"하, 하지만...!"

 

우성이 언성을 높이자 아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의 눈이 일순간에 날카로워진다. 윽, 무서워. 원체도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에게 면역이 없던 우성은 기가 팍 죽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정우성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뜨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기가 죽어도 주둥이 나발대는 것은 참지 못했더라.

 

"그쪽도 딱히 결혼하고 싶진 않아보이는데...."

 

그 말에 이명헌이 움찔했다. 정우성의 말이 정답이었다. 이명헌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은 거추장했고 무엇보다 현실을 모르는 이 도련님이 자신이 갖고 있는 꿈에 응당 같이 달려와줄지도 혹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사랑 하나 없이 만나게 된 배우자. 그 배우자의 꿈을 위해 함께 달리거나 무엇인가를 포기한다? 아무리 낭만을 꿈꾸는 인간이어도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할 게 뻔하다. 

 

"쉬워용. 이혼하면 돼용."

"그러니까 이혼은 뭐가 그렇게 쉬운데요."

"결혼으로 인해 사업이 합쳐지면 다시 분리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려용. 하지만 우리 둘 사이는 그냥 법정 가서 이혼소송하면 끝. 저 어르신들 주고받는 얘기만 끝나면 몰래 이혼하고 각자 살면 되는거예용."

"그게 결혼 무르는것보다 더 큰일인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죵. 사업 확장은 중요하니까. 그리고 저도 결혼을 해야 좀 자유로워지거든용."

"네?"

"여권을 뺏겼어용."

 

 

상견례가 끝나자마자 모든것은 일사천리였다.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인데 결혼준비까지 어떻게 얼굴 한번을 못 볼 수 있을까. 예복이며 식장이며 전부 집안에서 정한 플래너에게 맡기다보니 정우성은 할 것도 없이 시간을 보냈다. 신혼여행을 가려면 여권이 필요하고 자기는 그때 도망칠거다, 라고 호기롭게 말한 모습과 다르게 이명헌은 별 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때 주고받은 번호로 <형> <뭐하세요> 라고 실 없는 문자를 보내봐도 답장은 커녕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결혼식날.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의미없는 축사, 주례, 혼약, 피로연. 식이 끝나고 명헌은 우성이 운전하는 차에 타서 부모님이 구매한 신혼집으로 들어갔다. 신혼여행은 그리스였고 비행기는 내일 아침이었다. 

 

"형."

"형이라고 부르지마용. 왜용."

"그리스에 가면 어디로 도망칠거예요?"

"미국이용."

"미국은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용."

"예? 이 형, 바람둥이였네! 지금 나 두고 애인이 있다는거예요?"

"애인 아니에용. 그 사람은 절 몰라용."

 

 

그냥 단순히 가족을 따라간 해외여행이었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큰 누나 덕에 NBA 경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명헌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농구공을 들고 있는 9번의 선수. 이름도 모르고 팀 이름도 몰랐지만 이명헌은 그 사람에게 빠져들었다. 

 

한번도 부모님 속을 썩혀본 적이 없는데 명헌은 해야할 일도 미루고 계속 미국에서 머무르면서 경기를 보러갔다. 두번째 보러갔을 때야 외운 팀 이름과 그 사람의 이름. 일본인 출신으로 NBA에 드래프트된 사와키타 에이지는 성공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했지만 마음을 전한다던가 결혼을 하겠다던가 하는 마음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명헌이 미국에 갔을때는 16살이었고 그때 이미 사와키타 선수는 서른 여섯으로 곧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시즌은 사와키타의 은퇴 시즌이었고 명헌은 끈질기게 사와키타의 마지막 경기까지 보려고 했으나 부모님의 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사와키타의 은퇴 인터뷰는 집에서 유투브 영상으로 보게 되었다. 

 

사와키타에게 닿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농구를 나도 한번 해보고싶다. 그리고 언젠가 농구 선수가 되면 사와키타 선수에게 사인을 받아야지. 농구선수로서. 그러나 당연하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농구부터 배우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은 온통 공부 뿐이었다. 풍족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계속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하여 농구선수가 될 기회도 놓치니 한번도 부모 속 썩여본 적 없던 이명헌은 멋대로 기자회견을 잡아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농구야 취미 아니었니?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이명헌을 바라보았다. 명헌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 떠나고 싶으면 결혼부터 해. 이건 정말 중요한거야."

이혼을 하든 말든 그건 네 마음이고. 이명헌은 정우성의 사진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헤에. 형도 농구 하고 싶었구나."

"형이라고 부르지 말랬죵."

"별 거 없네요. 형이나 저나."

정우성은 휴지를 뭉치더니 휴지통으로 가볍게 던졌다. 

"저도 농구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부모님이 농구선수는 안된다는거예요."

"우성, 농구 할 줄 알아용?"

"원온원... 해볼래요?"

 

 

1년 후, 이명헌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가 바로 향한 곳은 잠실의 체육관이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약속이 있었다. 정우성의 대학 리그 선발전 경기. 이명헌은 답지않게 서둘러 뛰어들어가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워밍업을 하던 정우성은 이명헌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뭐야, 아는 사람?"

옆에서 땀을 닦는 동료선수가 물었다.

"아니,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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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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