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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명헌이 형 레시피

w. 목금토

@basketddorai

행복한 명헌이 형 레시피

 

재료 : 기분이 좋지 않거나 극도로 피곤한 명헌이 형, 멋지고 근사하고 듬직하고 섹시하고 기운이 넘치는 정우성, 적당한 온도의 목욕물, 뽀송뽀송한 수건, 마운틴 베이커리의 몽블랑 케이크, 카페 킹콩의 말차라떼, 차고 넘치는 사랑, 새로 꺼낸 이불

 

 

1. 기분이 좋지 않거나 극도로 피곤한 명헌이 형을 적당한 온도의 목욕물로 노곤노곤하게 불린 후 씻어준다.

 

     세상에는 회식을 동료와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화합의 장이자 남의 돈으로 먹고 마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회식은 단지 업무의 연장이요 이제는 없어져야 할 구시대의 악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가 있다. 명헌은 그중 후자에 속했다. 내 선수들은 예쁘고 기특하지만 구단 임원진까지 낀 회식 자리는 최악이었다. 딴에는 센스 넘친다고 생각해서 야심 차게 준비한 고리타분한 건배사에 끊임없이 에 하는 이상한 추임새를 연발하는 현실성 없는 독려 멘트, 그 뒤를 잇는 사무실 직원들의 눈물겨운 아부성 발언을 듣고 있으면 술을 목구멍이 아니라 귀에 쏟아붓고 싶었다. 창단기념일이니 신년회니 하는 의미 없는 회식에는 바쁘다는 핑계를 들어 빠질 수 있었지만, 시즌이 모두 끝난 후에 열리는 회식 자리에는 마땅히 댈 핑계가 없어서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회식에 참석해야만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연례행사처럼 드물게 회식 자리에 얼굴을 비출 때면 구단 사람들은 돌아가며 명헌을 붙잡고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며 술을 한 잔씩 권했다. 그렇게 얼굴이 보고 싶으면 평소에 선수들 훈련하는 거나 좀 보러올 것이지. 술과 담배 쩐내가 풀풀 나는 구취가 묻은 그 말은 언제나 명헌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명헌은 이걸 두고 시즌 가고 회식 온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했다.

 

"어이 이 감독! 이번에도 아주 잘해줬어요. 아, 뭐해들? 이번 시즌도 우리 구단을 승리로 이끈 이 감독을 향해 박수!"

 

     옆에 놓인 맥주잔을 노려보며 이걸 떨어뜨리면 취한 척하고 집에 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고 있던 명헌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달아오른 분위기만큼 명헌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도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명헌은 그것을 참 기괴하다 생각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명헌은 2차에 끌고 가려는 간악한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지갑 잃어버린 연기를 펼쳤다. 취기가 올라 판단력이 흐려진 관객들이 그의 어색한 연기에도 깜빡 속아 넘어간 덕분에 명헌은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고작 회식 1차에서 모든 기력을 소진한 명헌은 택시 뒷좌석에 비 맞은 곰인형처럼 널브러졌다. 기사가 라디오를 틀어도 되겠느냐 양해를 구했고, 그는 필요 이상으로 사적인 정보를 밝혀야 하는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두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는 딱히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던 목소리보다는 나았다. 명헌은 반쯤 감긴 눈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일이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눌 게 뻔한데도 십년지기 친구마냥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걸어가는 사람들, 술에 취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동료를 힘겹게 택시에 싣고 있는 사람들, 길바닥으로 집을 옮긴 사람, 아직도 불이 켜진 회사 건물, 차 사이로 위험천만한 곡예 운전을 하는 배달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했다. 명헌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택시는 아파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를 깨우기 위해 얼마나 손님을 외쳤는지 기사는 이미 짜증이 난 상태였다. 미간에 깊게 잡힌 주름을 본 명헌은 허둥지둥 값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차갑게 식은 밤공기가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몸을 감쌌다. 명헌은 몸을 부르르 떨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 우성은 마침 샤워를 마치고 거실의 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와 같이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던 그는 귀가한 명헌을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었다. 결혼한 지는 이제 겨우 반년이었지만 처음 만난 때부터 기간을 치자면 얼굴 보고 산 지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는 명헌을 볼 때마다 좋아죽겠다는 듯 굴었다.

 

"아, 형이다. 여보오 회식 어땠어요?"

 

     살짝만 뛰어도 천장에 정수리가 닿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가 반라의 모습으로 다가와 명헌을 끌어안았다. 방금 씻고 나온 몸은 따끈따끈하고 촉촉했고 뺨에 닿은 살갗에서는 쌉싸래한 자몽 향기가 났다.

 

"최악...."

 

     괜찮은 척할 기력 마저 모두 빼앗긴 명헌은 한 살 어린 남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응석을 부렸다. 좋은 냄새가 나는 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우성이 몸을 뒤로 빼며 명헌의 두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어떤 놈이 괴롭혔어요? 내가 미국 양아치들이랑 맞짱 뜨던 솜씨로 혼 좀 내줄까?"

 

     하는 말은 우스웠지만, 우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렇게 해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구단장의 뒤통수에 신발 자국을 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명헌은 반라 상태인 남편이 거리를 활보하게 둘 수 없었다. 그런고로 그가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허리에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았다.

 

"어우 우리 남편 능구렁이 다 됐네. 씻고 와요."

 

     우성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씨익 웃으며 명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두드렸다. 결혼 이후 우성은 명헌을 전보다 더 격없이 대했다. 명헌이 연상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우성의 손이 엉덩이골을 스치자 명헌은 그제야 뜨끈뜨끈한 남편의 몸을 밀어내고 곧장 안방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안방 문을 열어보기도 전에 우성에게 어깨를 잡혔고, 그대로 거실에 있는 욕실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우성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고, 명헌도 딱히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우성의 돌발행동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일이었다. 욕실 안으로 들어서니 습한 공기에서 라벤더 향기가 물씬 났다. 두 사람이 요즘 사용하고 있는 바디워시는 자몽 향이라 우성이 새로운 바디워시를 사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냄새가 날 수가 없었다.

 

"여보! 물에 몸 푹 담그고 있다가 나와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꼭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놓고 칭찬해주기를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명헌의 입가에서 웃음이 샜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욕조에는 웬일로 덮개가 올려져 있었다. 결혼 전부터 우성이 반신욕을 할 때마다 노트북 거치용으로 요긴하게 쓰는 물건이었는데 운이 좋게 새로 입주한 아파트 욕조에도 사이즈가 맞아 예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욕탕이 아니면 몸을 담그지 않는 명헌에게는 여전히 낯선 물건이었다. 걷어내려고 보니 원목으로 만들어져 보기보다 무게가 있었다. 끙차. 기합을 넣고 힘을 주어 덮개를 들어 올리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분홍색 물에서 짙은 라벤더 향기가 올라왔다. 시즌이 끝나고 맞은 첫 휴일을 혼자 보내게 한 자신이 미울 법도 한데 투정을 부리기는커녕 자신을 위해 목욕물까지 준비해준 정성에 웃음이 났다.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지. 나이 든 기혼자들이 으레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욕조 속에 손을 담갔다. 회식이 꽤 늦어질 때를 대비한 건지 물이 꽤나 뜨거웠다. 명헌은 느린 움직임으로 옷을 벗어 욕실 밖으로 대충 던져두고 욕조에 찬물을 채웠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우글우글 솟아나는 거품을 바라보며 욕조 끄트머리에 뺨을 기댔다. 수면이 요동치면서 라벤더 향이 더 짙게 퍼져나왔다. 향수니 방향제니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 향은 꽤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맡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 게 아로마 테라피라는 게 그저 위약효과나 내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라벤더 향이 가득 들어차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들이마신 만큼 길게 숨을 뱉어내고 또 다시 채우기를 몇 번 반복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뺨에 뜨뜻한 물이 닿았다. 황급히 물을 껐지만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은 일렁이며 밖으로 넘치고 있었다. 쯧. 엎질러진 물은 다시 채울 수 없다는데 꽉 채워진 물은 엎지르기에 아까웠다. 그렇다고 어디 따로 떠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는 수 없이 욕조에 발을 담갔다. 고작 발만 담갔는데도 꽤 많은 양이 흘러넘쳤다. 우성이 애써 입욕제까지 풀어놓은 물이 수챗구멍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까워 차마 앉을 수가 없었다. 욕조가 좀 더 커야 했나? 취한 머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을 확장시켰다.

 

 

 

2. 뽀송뽀송하게 잘 말려둔 수건으로 따끈말랑해진 명헌이 형을 톡톡톡 두드려 닦아준다.

 

     길고 긴 목욕-정작 씻는 시간보다 욕조에서 자느라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을 끝낸 명헌은 욕실 문을 빼꼼히 열고 우성을 불렀다. 수건이 없었다.

 

"우성."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우성은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한달음에 달려와 척 보기에도 푹신푹신해 보이는 수건 뭉치를 내밀었다.

 

"입욕제 어땠어요? 그게 마음 진정시켜주는 데 좋다 그래서 사봤는데. 향 너무 세지는 않았어요? 반만 넣을까 하다가 그냥 다 넣었거든요."

 

     남들 앞에서는 몇 마디 하지도 않는 사람이 꼭 명헌과 있을 때면 세상 제일가는 수다쟁이가 됐다. 명헌은 그런 그의 말에 일일이 답해주는 것을 귀찮아 하면서도 촉새가 된 남편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연애 초반에는 자신의 사랑이 얕아 그를 귀찮게 여기는가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동 행동 교정 프로그램에 나온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유치원에서 최대한 늦게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한 대상에게 사랑과 귀찮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헌은 그때서야 자신이 정말 우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헌이 수건을 집으려고 열린 문틈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미니 우성이 수건을 들고 방긋 웃으며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새로 깐 마룻바닥에 물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방실방실 웃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도 버티고 있을 재간은 없었다.

 

"이벤트 뿅?"

 

"그런 거죠."

 

     우성은 보드라운 수건으로 명헌의 몸 구석구석을 톡톡 두드려 물기를 닦아냈다. 일전에 우성이 머리를 말려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전신을 닦아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혼 삼 개월 만에 빼앗긴 신혼생활을 지금부터라도 만끽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는 것이 귀찮고 고될 법한데도 우성은 마냥 즐겁다는 듯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즐기는 것 같네."

 

"우리 남편 몸이 너무 좋아서. 이 몸이 내 거라니 보기만 해도 황홀하잖아요."

 

     허벅지를 닦아주느라 무릎 꿇고 있던 우성이 대뜸 명헌의 배에 뺨을 비벼댔다. 평소였다면 머리통을 농구공 잡듯 꽉 잡아 떼어놓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이 정도 희롱은 받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잘 익은 밤톨마냥 짧고 동그란 남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삼십 대라고는 믿기 힘든 말간 얼굴이 방긋 웃으며 명헌을 올려다봤다. 이 얼굴이 내 거라니. 명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이참. 왜 그렇게 잘생기게 웃어요. 반해서 키스 할 뻔했네. 얼른 옷 입고 부엌으로 와요. 여보가 좋아하는 거 줄게요."

 

     우성은 명헌을 으스러뜨릴 듯 세게 안으며 뺨에 입을 맞추고는 전라인 남편을 욕실 앞에 내버려 두고 혼자 부엌으로 향했다. 고작 회식 한 번 다녀왔을 뿐인데 우성은 뭘 많이도 준비한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기분파에 어리광쟁이이면서도 가끔 과분하다 싶을 만큼 자신에게 헌신하는 그를 보면 그 간극 때문에 꼭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명헌은 욕실 앞 파우더룸의 옷장에서 샤워가운을 꺼내 걸치고는 휘적휘적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3. 뽀송뽀송해진 명헌이 형에게 마운틴 베이커리의 몽블랑 케이크와 카페 킹콩의 말차라떼를 먹인다.

 

     명헌이 샤워가운의 허리끈을 느슨하게 한 번만 묶은 채 식탁 앞에 털썩 앉았다. 명헌이 가장 좋아하는 검은색 머그컵을 조심스럽게 들고 오던 우성이 눈총을 줬지만, 명헌은 아랑곳 않았다.

 

"옷 입고 오라니까요."

 

"어차피 벗길 거잖아 뿅."

 

"아니, 그래도. 벗기는 재미가 있는 거라고요.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와요. 안 그럼 이거 안 줄 거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굳이 품에 안으며 몸을 돌리기까지 하는 걸 보며 이렇게까지 실랑이를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헌은 하는 수 없이 잠옷을 입기 위해 안방으로 갔다. 곧장 옷방으로 들어가려던 명헌의 시야에 베이지색 이불 위에 놓인 남색의 무언가가 걸렸다. 그것은 명헌이 대학 시절 입고 다녔던 단체복이었다가 졸업 이후 잠옷으로 용도가 바뀐 트레이닝복이었다. 적당한 무게감이 있는 원단이었지만 본래 몸과 하나였던 것처럼 편안하고 은근히 살에 닿는 촉감도 좋아서 결혼 전까지 주야장천 입었더랬다. 그러나 애용한 탓에 목은 다 늘어나고 수십 번의 세탁을 거쳐 희뿌옇게 색이 달아난 탓에 우성은 이 잠옷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런 것을 우성이 제 손으로 꺼내다가 잘 개서 침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성이 필요 이상으로 고집부린 이유를 알고 나니 웃음이 났다. 곧장 안방으로 가서 바로 입을 수 있게 침대 위에 올려둔 트레이닝복을 보고 감동받아야 하는데 샤워가운만 덜렁 걸치고 주방에 늘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이쯤 되니 이 이벤트가 어디까지 계획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명헌은 샤워가운을 대충 벗어 던져두고 트레이닝복 구멍에 팔과 다리를 밀어 넣으며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갔다.

 

     다시 부엌으로 오니 명헌이 앉았던 자리 앞에 눈에 익은 몽블랑 케이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록색 음료가 놓아져 있었다. 초록과 하양이 완전히 섞이지 않은 얼룩덜룩한 모양새와 쌉싸래한 향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말차라떼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는 역시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표정을 한 우성이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언제 준비한 거야?"

 

     가늘게 뽑아낸 크림을 두른 작은 케이크 꼭대기에 아랫부분에 깨를 묻혀 밤의 원형을 살린 밤조림을 얹은 것은 명헌이 가장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검은 머그컵에 담긴 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카페 킹콩의 말차라떼일 것이라고 명헌은 추측했다. 스스로도 힐링 조합이라고 부르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와 음료가 눈앞에 놓여 있으니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우성은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주면 멋없죠. 자, 얼른 먹어요."

 

     언제부터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실행에 옮기고 그 과정 중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었는지를 줄줄 읊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우성의 반응은 담백했다. 대신 명헌의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는데 늘 버릇처럼 명헌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의외의 행동이었다. 그것은 손바닥보다 작고 아기자기한 케이크를 망치는 즐거움을 명헌의 몫으로 남겨주려는 그의 배려인 듯했다. 명헌은 가장 좋아하는 이 케이크를 먹을 때면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늘 일정한 순서대로 움직였는데 항상 그 과정의 마지막에 가서야 케이크 위에 장식된 밤 조림을 먹었다. 작은 동전 크기의 알밤을 통째로 입에 넣고 어금니로 천천히 뭉개면 밤 조림 안에 고여있던 단물이 흘러나왔는데 진한 밤의 향기를 머금은 이것이 아랫부분에 묻어 있던 깨의 고소함과 섞이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니 이 밤을 먹는 것은 몽블랑 케이크를 온전히 즐긴 다음에 찍는 일종의 마침표였다. 하지만 오늘은 남편 덕분에 이미 케이크를 완벽한 순서로 먹었을 때보다 더 크고 단단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케이크를 완벽하게 즐기지 않아도 괜찮았다. 명헌은 잘 조려져 반들반들 윤이 나는 밤을 포크로 떠서 우성에게 내밀었다. 밤이 사라진 케이크는 단조로운 모양새였지만 상관 없었다. 그건 단지 케이크일 뿐이니까.

 

"나 주는 거예요? 진짜?"

 

     평소 명헌의 루틴을 아는 우성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고작 밤 한 알인데도 그는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밤과 명헌을 번갈아 보았다. 낯부끄러운 반응에 마음이 사그라들어 싫으면 말고, 하며 밤을 제 입으로 가져가려니 커다란 몸뚱이가 식탁을 가로질러 쑥 다가왔다.

 

"줬다가 뺏는 게 어디 있어요? 먹여줘요. 아!"

 

     명헌은 입을 벌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우성을 보며 입으로 먹여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힘이 넘치는 남편이 그 후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했고, 회식에 시달리다 온 명헌은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반들반들한 알밤은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우성의 입에 쏙 넣어졌다. 우성은 자신이 어떤 이벤트를 놓쳤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흥겨운 콧소리를 내며 밤 조림을 오물오물 씹었다.

 

 

 

4. 새로 꺼낸 이불을 깔아놓은 침대에 명헌이 형을 눕힌 뒤 꼬옥 안아서 재운다.

 

     케이크와 말차라떼를 말끔하게 해치운 명헌이 이를 닦는 동안 우성은 요란스럽게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급한지 화장실로 달려와 명헌의 옆에 붙어서서 이를 닦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에도 우성은 기운이 넘쳐 보였다. 공연히 말을 걸었다가는 뭔가 귀찮은 패턴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명헌은 남편이 계속 방실방실 웃는 이유를 묻는 대신 서둘러 양치를 끝내고 먼저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우성이 또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따라 나와서는 명헌을 번쩍 안아 들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근육량이 많이 줄기는 했어도 명헌은 여전히 근육질인데다가 백팔십이 넘는 거구의 남성이었다. 그런 그를 우성은 작고 가녀린 사람을 들 듯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갑자기 왜 이래?"

 

"여보 좀 많이 먹어야겠어요. 전보다 더 가벼워졌어."'

 

     명헌의 말을 가볍게 넘긴 우성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다가올 운명을 예견한 명헌은 체념한 얼굴로 제발 한 번으로 끝낼 수 있기만을 빌었다. 우성은 명헌을 곱게 침대 위에 눕히고는 기분 좋은 향이 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준 뒤 침대를 빙 돌아서 옆으로 와 누웠다. 자몽 향이 나는 커다란 몸이 명헌의 몸을 감싸 안았다. 명헌은 그 뒤에 이어질 행위 때문에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성의 손은 명헌의 팔뚝을 감싼 채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예쁘게 눈웃음을 지을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안 해?"

 

     결국 명헌은 직구를 던졌다. 그런데도 우성은 뺨에 입을 맞춰줄 뿐 그 이상으로 찐득한 짓은 하지 않았다. 연인으로 그와 함께한 시간만 십 년이 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자제력은 우성의 사전, 아니 명헌과 함께 있는 우성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여보 피곤하잖아요. 오늘은 이만 자요."

 

     제법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역시나 묘하게 칭찬을 바라는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명헌은 그제야 이것 또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우성의 이벤트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곤할 남편을 위해 넘치는 욕구를 참는 것을 이벤트로 삼는 사람이 세상에 우성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성의 이벤트는 참 우성다웠다.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것도 싫지는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자신의 컨디션을 생각해 넘치는 힘과 사랑을 묶어둘 생각을 한 남편이 기특했다. 명헌은 몸을 돌려 우성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 컸네."

 

"또 애 취급."

 

     우성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럴 때면 명헌은 우성의 튀어나온 입술이 꼭 새 부리 같다고 생각했다. 덩치는 산만한 주제에 아직도 아이처럼 삐죽이는 것이 귀여워서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우성에게 뽀뽀는 늘 통했다. 명헌이 아무리 서운하게 굴어도 입술만 한 번 맞대주면 우성은 금방 기분이 풀어졌다. 치사하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은 무뚝뚝하고 남편은 늘 적극적인 표현을 바라는데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 간극은 좁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헌은 뽀뽀를 자주 써먹곤 했다. 대충 넘어가려 한다며 한 번쯤을 성을 낼만도 한데 우성은 늘 쉽게 넘어가 주었다.

 

"잘 자."

 

"사랑해요."

 

 

 

5. 행복한 명헌이 형 완성!

 

     아직 새도 울지 않는 이른 시각. 명헌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에 짓눌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는데 따뜻한 손이 뺨을 쓰다듬었다. 굳은살이 박여서 살갗에 닿는 감촉은 거칠지만 움직임은 한없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 명헌은 다시 눈을 감고 따뜻한 손바닥에 뺨을 부볐다.

 

"내가 깨웠구나. 미안해요. 더 자."

 

"으응. 운동 가?"

 

"응. 우유도 사야 해서 겸사겸사 다녀오려고요. 오는 길에 밤식빵도 사 올까요?"

 

     명헌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뻗었다. 그렇게 하면 우성은 늘 뜻을 알아채고 몸을 숙여주었고, 명헌은 그에게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우성의 품에 기대는 것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명헌은 이것을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했다. 오늘처럼 여유가 있는 날이면 명헌은 항상 자는 동안 체온이 올라가서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해진 우성에게 기대어 얕은 잠을 청했다. 깊은 잠을 쭉 이어서 자고 일어나는 것보다 이렇게 잠깐 일어났다가 선잠을 자고 완전히 깨는 쪽이 더 개운하게 느껴져서였다.

 

"이러면 갈 수가 없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성의 손은 명헌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긴 손가락은 짓궂게 옆구리 살갗을 간질였다.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서 간지럽히지 못하게 하자 이번에는 얼굴 곳곳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결국 명헌은 그를 피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다녀올게요. 내 꿈 꾸고 있어요, 여보."

 

     이불 위로 커다란 몸이 잠깐 체중을 실었다가 사라졌다. 명헌은 졸린 눈을 깜빡이며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정해진 일정이 아무것도 없는 하루가 아주 평화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도 농구에 몸을 담고 있는 죄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빼앗겼던 신혼생활을 이제야 되찾은 것 같았다. 명헌은 아직 우성의 온기가 남아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시트 위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자 우성이 남기고 간 열기와 함께 체취가 느껴졌다.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나니 수마가 덮쳐왔다. 명헌은 다디단 향내에 취한 채 속절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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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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