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Wedding? Betting? Dress!>
 

w. 소리

@dunklena_

우성이 떨리는 입술을 열어 질문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웨딩 드레스를 입어 달라고요?"

 

명헌이 대답했다.

 

"뿅."

 

우성이 다시 질문했다.

 

"…그거 입고 사진도 찍고?"

 

명헌이 한 번 더 대답했다.

 

"삐뇽."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대화가 이 꼴이 났더라. 분명 처음엔 평범하게 웨딩 촬영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성은 황망하게 제 손 아래 놓인 카탈로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름 모를 꽃들로 뒤덮인 언덕 위, 새하얀 드레스와 수트를 입고 풍선다발을 잔뜩 손에 쥔 모델들이 그를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게 문제인가? 우성은 일단 카탈로그를 얌전히 접어 발치에 내려두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형 그런 페티시…가 없진 않았죠 응."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우성이 애매하게 혼자 납득했다. 그간 명헌이 들고 왔던 기상천외한 물품 및 의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간 탓이었다. 그때까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간결한 대답만 되풀이하던 명헌의 눈썹이 아주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오해 뿅. 페티시가 아니라 궁금했을 뿐인 거 뿅."

"세간에선 보통 그런 걸 페티시라고 하던데……."

"그래서 안 해 줄 거야?"

 

뿅.

 

평소보다 반 박자를 느릿하게 따라붙는 말꼬리에는 언제나 거절을 어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고작 1년 반도 채 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이 만들어 준 습성인 건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거쳐 온 사랑이 선사한 주문인 건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성은 그랬다. 이 형도 매번 알면서 이러지. 짐짓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명헌을 흘겨본 우성이 뾰족하게 입을 열었다.

 

"이유."

 

말해봐요. 뾰족한 눈길보다는 조금 덜 뾰족한 목소리가 나갔다. 일종의 필살기에 당했어도 쉽사리 휘둘려 줄 생각은 없다. 이쪽도 나름 면역이 생겼다 이거야. 우성은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디 한 번 들어는 보겠다는 태도였다. 명헌의 눈동자가 잠깐 모로 미끄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남자의 로망 아니겠나용.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 우성이 내 로망을 망쳐놨으니 우성이 책임져야지용."

"형, 나 진짜 상처받아요."

"미안, 농담 뿅."

"드레스는?"

"그건 진담."

 

짧은 대답에 결국 우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 형 진심이구나…….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어 잡히지도 않는 짧은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의아한 심정에 양쪽 높낮이가 다르게 삐딱해진 눈썹으로 생각했다. 웨딩 드레스 그거 한 번 입는다고 우성이의 작은 우성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고, 명헌이 이렇게까지 바라는 일이라면야 못해줄 건 없었다. 못해줄 건 아닌데.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얘기해줘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우성의 감각이 속삭였다. 단순히 제 연인이 은밀한 페티시 소유자라는 속 편한(편한 건가? 잠깐 고민했다.) 오답 말고 분명 다른 정답이 있다. 그걸 명헌이 왜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우성의 빤한 시선이 명헌을 옭아맸다. 더 이상 압박해 들어오지도 않지만 물러서지도 않는 빈틈없는 시선.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진다. 결국 명헌이 먼저 손을 들었다.

 

"웨딩 수트는 좀 흔하잖아.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전부 볼 거고. 그런 거 말고 나만 볼 수 있는 네 모습이 갖고 싶어서. 뿅."

"……혀엉……."

 

우성의 얼굴이 단번에 풀어졌다. 진지하던 눈동자가 감동으로 젖어드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성이 제 감동을 언어로 내뱉으려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그보다 명헌의 입술이 열리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심지어 웨딩 수트는 화보로도 입었지 뿅. 나보다도 먼저 본 사람이 전세계에 수만명…,"

"아 형 지금 그 얘긴 반칙이죠!"

 

우성이 비명을 질렀다. 허를 찔러 들어온 국내 최고의 포인트 가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국내 잘나가는 포인트 포워드는 불시에 3점슛을 허용한 죄로 잠시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했다. 끄으으응. 지은 죄가 있어 항변도 못하겠고.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던 우성이 기어이 한 마디를 했다. 치사해요 형. 그 얘긴 더 이상 안 한대놓고.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물었잖아용. 아니 이런 이유일 줄 내가 알았나….

 

결국 본전도 못 찾았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지나간 명헌의 대답을 떠올리자 피실피실 웃음이 흘렀다. 우성은 슬금 명헌에게 손을 뻗었다. 무덤덤한 눈동자가 제 손등을 잡아오는 체온에 닿았다 떨어졌다. 오케이. 여기까지는 괜찮고.

 

"……근데 형, 그렇게 치자면 나도 똑같거든요? 나도 이 사람이 내 거라고 남들에게 전부 드러내 자랑하고 싶다가도, 나만 아는 형의 모습이 갖고 싶은데."

 

기다란 손가락이 저보다 조금 더 굵은 마디 사이를 파고 들었다. 명헌은 여전히 우성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내기할까요? 진 사람이 웨딩 드레스 입어주는 걸로."

"…우성 그런 취향이었냐 뿅."

"아 또 이렇게 나한테 덮어씌우지! 이번엔 안 통해요!"

 

내기 안 들어주면 나도 안 입을 거니까요. 손등을 꽉 쥐고서 내뱉는 말이 제법 단호했다. 명헌이 우성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냈다.

 

"뭘로 할 건데? 농구로 하자는 비겁한 얘긴 아니겠지용."

"농구 선수끼리 웬 비겁. 그럴 생각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고 싶잖아요."

 

없는 말은 아닌 듯 매끈한 얼굴 위로 갈등이 한차례 지나갔다. 에라, 기분이다. 봐줬어요. 삼세판 내기로 하고 종목은 내가 하나, 형이 하나, 둘이 합의해서 하나. 어때요? 어디가 봐준 건지 모르겠는데 뿅. 명헌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켜고 검색창을 불러들였다. ‘내기 종목 추천’ 깜빡이는 커서가 완성해낸 글자를 바라보던 우성이 씩 웃었다. 두고 봐요. 곧 알게 될 테니까.

 

근데 형. 사실은 아까 형만 보는 내 모습 어쩌고는 핑계고 그냥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뿅.

 

 

***

 

 

ROUND 1. 

 

종목 : LA 레이커스 역대 선수 명단 대기

규칙 : 

 1) 현역, 은퇴 선수 상관없음.

 2) 상대방이 이름을 말한 후 2초 내로 이어가지 못하면 패배

 3) 같은 이름을 중복해서 말해도 패배

제안자 : 정우성

 

우성은 자신만만했다.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이명헌이다. 제가 가진 최고의 한 수를 써야만 했다. 그에 반해 명헌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우성은 명헌이 일찌감치 패배를 예감하고 다음 수를 궁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삼 초를 양보한 우성의 넓은 아량 덕에 명헌이 세 명의 이름을 대고 시작했다.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제리 웨스트……. 농구를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이름들에서 출발한 랠리가 점점 범위를 넓혔다. 정우성, M. 화이트, W. 릭스……. 과거의 영광을 지나 우성의 현재 동료들의 이름이 하나 둘 언급됐다. 우성은 감격했다. 명헌이 기억하는 저희 팀 동료들의 이름이 제 예상보다 제법 상세하고 많은 덕이었다. 가끔은 우성이 언급했던 팀 닥터나 구단 관계자의 이름이 무심결에 튀어나오기도 했다(정답처리 해줬다.). 그런데…,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지 않나?

 

아 잠시만요 형. 언제부터 그냥 되는 대로 아무 이름이나 내뱉고 있었던 거예요?!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네!

 

쯧. 명헌이 혀를 찼다. 아깝뿅.

 

정우성 1승.

스코어 1:0

 

 

***

 

 

ROUND 2. 

 

종목 : ???의 게임 운영에 모든 걸 맡긴다. 

규칙 : ???

제안자 : 이명헌

 

 

이명헌님이 산왕 정성구님, 산왕 최동오님, 산왕 신현철님,

산왕 김낙수님과 산왕 신현필님을 초대했습니다.

 

오후 4:09 [급한 일뿅 다들 모여봐라뿅]

산왕 신현철

  [?] 

  [뭐냐] 오후 4:10

산왕 정성구

  [(손 이모지)] 오후 4:10

산왕 최동오

  [무슨 일 있어 명헌아?] 오후 4:12

산왕 신현철

  [아서라 동오야]

  [또 별거 아니겠지] 오후 4:12

산왕 김낙수

  [.] 오후 4:13

[진지하게 대답용]

[정우성이랑 나 둘 중에]

오후 4: 13 [누가 더 웨딩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냐 뿅]

산왕 신현철

  [?] 오후 4:13

  [뭔] 오후 4:14

산왕 정성구

  [???] 오후 4:14

산왕 최동오

  [음] 오후 4:14

산왕 정성구

  [?????] 오후 4:14

산왕 신현철

  [내가지금뭘본거냐] 오후 4:14

산왕 최동오 

  [혹시 결혼식 때 입는 거야?] 오후 4:14

산왕 정성구

  [오....] 오후 4:14

 

산왕 김낙수님이 나갔습니다.

이명헌님이 산왕 김낙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오후 4:14 [뿅]

 

산왕 김낙수님이 나갔습니다.

이명헌님이 산왕 김낙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오후 4:15 [삐뇽]

산왕 김낙수님이 나갔습니다.

 

산왕 정성구

  [오.......] 4:15

산왕 신현철

  [나도 나가도 되냐] 오후 4:15

산왕 최동오

  [낙수가 한 번만 더 초대하면 죽인다는데 명헌아] 오후 4:15

 [매정삐횽]

오후 4:15 [그럼 김낙수 기권뿅 이제 기권 없다뿅]

산왕 신현철

  [하] 오후 4:15

산왕 정성구

  [내가 먼저 나갈걸] 오후 4:15

산왕 신현철

  [아침댓바람부터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오후 4:15

 

 

이후 지리한 토론의 과정을 거쳐 명헌이 받아낸 투표 결과는 이러했다.

 

정우성 1표. ([그래도 역시 굳이 구우우우ㅜ욷이 고르자면 정우성 쪽이] [나 이거 진짜 계속해야 하냐] [진심 속이 안 좋은데] [ㅇㅋ신현철은 우성용] [역시 산최미 창시자뿅 믿었뿅] [염병 내 죄가 크다..........])

이명헌 1표. ([정성구 장난뿅?] [진지하게 골라.] [미안한데 진지하게 고른 거다] [아무래도 우성이보단 이명헌 쪽이 좀 더 끔찍하지] [이 치욕은 꼭 갚는다뿅] [어엉 들어오면 연락해라~])

기권 2표. ([기권 없다고 했잖아용 최동오 죽을래용] [ㅎㅎㅎㅎ미안 명헌아;;] [그렇지만 진짜 못 고르겠어서 그래. 그냥 둘 다 입으면 안 되나?])

 

결국 이번 승부의 행방은 이제 단 한 사람의 손에 달린 셈이었다. 

 

몰래 제 폰으로 현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우성의 옆구리에 명헌의 펀치가 작렬했다. 단체 톡방의 마지막 1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명헌이 우성에게 폰을 압수당했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진동이 울렸다. 초조하게 휴대폰 액정만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이 벼락 같은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산왕 신현필

  [메시지 늦게 확인해서 죄송해요 명헌이 형...!] 

  [많이 고민해봤는데 역시 두 분 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오후 4:49

  [결국 제가 못 고르고 제비 뽑기를 해봤어요] 

  [(사진)] 오후 4:50

 

 

"현필아아아아아!!!"

 

정우성이 울부짖었다.

 

이명헌 1승.

스코어 1:1

 

 

***

 

 

ROUND 3. 

 

정우성과 이명헌이 나란히 1승 1패. 승부는 어느덧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은 하나의 종목을 어떻게 결정할지 고민하던 두 사람은 현필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우성이 상자를 가져왔다. 얼마 전 새로 주문한 바스켓 슈즈가 마침 도착해 있었다. 명헌이 커터칼을 들고 상자 뚜껑의 가운데 길쭉한 홈을 만들었다. 상자 옆으로는 쪽지 하나가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작은 구멍을 냈다. 모양은 사각형으로. 한쪽 변은 칼집만 내서 여닫을 수 있게. 내친 김에 굴러다니던 나사못도 하나 찔러 넣어 손잡이 대용으로 삼았다. 빡빡한 종이 문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하던 명헌이 만족한 얼굴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누구 게 나와도 원망하기 없기예요."

"내가 할 말 뿅." 

 

서로에게서 다짐을 받아낸 두 사람이 등을 돌리고 각자의 종목들을 쪽지 위에 썼다. 명헌이 먼저 집어넣고 다음이 우성. 달랑 두 개 분의 쪽지만을 위했다기엔 제법 거창해진 상자를 내려다보다 우성이 입을 열었다. 한 열 개쯤 더 써서 집어넣을까요? 그래 뿅. 같은 걸로? 음, 그건 자기 마음대로? 우성과 명헌의 손에서 쪽지 열여덟 개가 더 만들어졌다.

 

스무 개 째의 쪽지까지 집어넣고 나자 상자의 소리가 제법 화려해졌다. 칵테일 쉐이커마냥 상자를 현란하게 흔들어 대던 우성이 명헌에게로 상자를 넘겼다. 명헌은 간결한 동작으로 상자를 털어내듯 흔들었다. 딱 세 번. 상자를 쥐고 있던 명헌의 손 위로 우성이 손이 얹어졌다. 그럼 열게요? 뿅. 우성의 손가락이 작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누구의 손길에랄 것 없이 상자가 기울어진다. 비스듬하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아."

 

꼬깃꼬깃 접은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서로에게로 돌아간 시선에 같은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어라?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우성이 다시 쪽지를 바라보았다. 종이, 이상 없음. 내용, 분명 제가 쓴 것이 맞음. 그런데 이 글씨체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대로 뒤집었다. 하얀 쪽지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우성의 하던 양을 의아하게 지켜보던 명헌도 무언가 눈치챈 듯 우성을 따라 쪽지를 하나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둘, 셋, 넷……. 마지막 쪽지가 명헌의 손에서 팔랑이며 떨어졌다. 주변으로 흩어진 종이들이 같은 음색으로 바스락거렸다. 결국 두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가요 형. 한참을 웃어대던 우성이 명헌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명헌은 저항 없이 그 손을 따라 일어났다. 삐리릭. 현관 도어가 닫히는 소리 뒤로 저녁 햇살이 스며들었다.

 

 

 

5점 매치?

 

명헌이 물었다.

 

10점으로 하죠.

 

우성이 대답했다.

 

하루종일 할 생각이냐 뿅….

 

명헌이 공을 집어들고 한숨을 쉬었다. 

 

에이, 형도 좋으면서. 그리고 기회가 많아야 그래도 좀 해볼만하지 않겠어요?

 

우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농구공이 품에 날아 들어와 안겼다.

 

건방져용.

 

자세를 낮춘 명헌이 두 손으로 코트 위를 내리친다. 팡! 마룻바닥이 아님에도 발밑이 울리는 것 같았다.

 

들어와. 정우성.

 

그 언젠가의 주장은 에이스에게 기꺼이 선공을 넘긴다. 에이스는 웃는다. 둘의 마지막 종목은, 당연하게도 농구였다.

 

 

***

 

 

"치사한 뿅. 매정한 뿅. 위아래도 없는 삐뇽."

 

허억, 허억. 밤공기를 가르는 거친 호흡 사이사이에 욕설이 섞여들었다. 명헌과 함께 코트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있던 우성이 억울한 소리를 냈다.

 

"나 혼자 정했어요? 봐주면 봐준 대로 더 화냈을 거면서. 그리고 저도 엄청 필사적이었거든요. 형 외곽 수비가 더 좋아졌네요."

"선심 쓰듯 얘기해도 하나도 안 기쁘다 뿅."

"아, 진심이라고요! 다 아는 사람이 또 그런 말을 해."

"코트 위에 더 오래 남아있으려면 뭐라도 더 해야지. 뿅."

 

상체를 일으킨 명헌이 물을 찾았다. 우성이 손을 뻗어 제 물통을 건네주었다. 10점 매치로 시작했던 원온원은 5점 매치 한 번, 3점 매치 두 번, 그리고 다시 10점 매치 한 번을 거치고서야 끝이 났다. 첫 판을 시작할 때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던 해는 완전히 져버린 지 오래였다. 

 

우성은 명헌을 올려다봤다. 물을 넘기는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인다. 햇빛 대신 코트를 밝혀 주던 야외 조명의 빛을 받아 명헌의 피부 가장자리가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땐 해가 지면 농구를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형 턱선 타고 땀방울 흐르는 것도 잘 보이네. 광철한테 자랑해야겠다. 아빠 아들 이제는 해 지고 난 다음에도 실컷 농구할 수 있고, 형 모습도 실컷……. 

 

"아야! 왜요!"

 

부지불식간에 이마 위로 내려앉은 딱밤에 우성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눈빛이 음흉 뿅."

"와, 지금 진짜 로맨틱한 생각 중이었거든요? 뭘 몰라도 진짜 모른다니까."

"아까는 다 안다면서용."

"그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나 보죠. 나도 물 좀 줘요."

 

물통이 다시 우성에게로 돌아왔다. 저도 상체를 일으켜 물을 마시면서 우성은 명헌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땀이 식어 체온이 내려갔는지 벗어 뒀던 티셔츠를 꿰어 입던 명헌이 시선을 느끼고 우성과 눈을 맞췄다.

 

"왜?"

"으음."

 

도르륵. 우성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이걸 물어볼까 말까. 제가 스스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건 아닐까 짧게 고민했으나 이번에도 이긴 건 호기심이었다.

 

"음흉하다길래 궁금해진 건데…. 나한테 웨딩 드레스 입히고 뭐 시키고 싶었어요?"

 

어차피 졌으니까 말이나 해 봐요. 

 

쭉 뻗었던 다리를 양반다리로 고쳐 앉으며 우성이 옆에 굴러다니던 농구공을 가져와 품에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입에서 무슨 기상천외한 대답이 나올까 대비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명헌이 말없이 우성을 응시했다. 1초, 2초, 3초…….

 

"……."

"……형?"

 

침묵이 10초를 지날 때쯤 되자 우성도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이 형, 진짜로 나한테 말도 못할 변태적인 걸 시키려고 했나…? 아니, 그렇지만 이미 그런 건 애저녁에 다른 거 입고도 다 했는데? 드레스가 특별한 건가? 진짜로 드레스에 페티시 있나? 설마, 정말로 남자의 로망 어쩌고 하던 게 진심이었나? 그게 미안해서 얘기를 못하는 거야? 결혼 입장도 드레스 입고 시키려던 건 아니지?!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던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위에 다다랐다. 하필 때마침 명헌의 고민도 끝난 듯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두툼한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보고 우성은 다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산왕 시절에,"

"형진짜미안한데아무리그래도우리엄마아빠도오고식장에서만큼은안되겠-! ……네?"

"……용?"

 

침묵이 다시 한 번 지나갔다.  

 

"……아, 그, 산왕, 산왕이요. 아하하. 난 또. 어 그러니까 산왕 시절에, 뭐요……?"

"……."

"……미안해요 형. 입 다물고 들을 테니까 한 번만 더 말해줘요."

 

우성이 두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눈썹까지 아래로 늘어뜨리고 한껏 처량한 표정을 짓는다. 어둑한 눈빛으로 우성을 바라보던 명헌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왕 시절에 홈 유니폼이 흰색이었잖아."

 

뜬금없이 웬 유니폼? 설마 그 때부터 유니폼 대신 웨딩 드레스를 입히고 싶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또 불경한 의문이 스쳐 지나갔으나 말을 할 수 없었던 우성은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끄덕끄덕.

 

"……그래서 그런지, 가끔 네가 덩크를 하려고 림으로 뛰어오를 때면 그 뒤로 하얀 빛이 물결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거든."

"……."

"어떨 땐 파도마냥, 어떨 땐 날개마냥."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서 지금은 아스라이 멀어진 어딘가를 짚는 듯한 명헌의 시선이 림을 향했다.

 

"그냥 아까 드레스 화보를 보는데 문득 그 때 생각이 나서, 그래서 한 번 얘기해봤어. 뭐, 드레스 입고 농구하는 사진이라도 찍으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안 했던 건 아니고. 나만 보는 네 모습이 갖고 싶었던 것도, 맞긴 하고."

 

근데 설마 진짜로 입겠다고 할 줄은 몰랐지용. 담담한 목소리가 말을 맺는다. 대화가 끊긴 공백을 풀벌레 소리가 메꿀 때까지도 우성의 눈동자는 명헌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또 다시 1초, 2초…… 그리고. 가만히 밤공기를 들이마시던 명헌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별것도 아닌 얘기였는데 네가 중간에 난리치는 바람에 더 쪽팔려졌다 뿅."

"……형."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아무 말도 하지마라 뿅."

 

쪽팔려서 짜증나용. 결국 드레스도 내가 입게 됐고용. 답지 않게 투덜거리고는 다시 코트 위로 몸을 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얘기도 꺼내지 말걸 삐횽…….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서 중얼거리는 말에 제법 진심이 가득하다. 말없이 명헌을 바라보던 우성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철썩, 농구공이 그물을 통과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잇따른다. 깨끗한 클린 슛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그러게 쪽지 하나 정도는 다른 걸 넣었어야지."

"뾰홍……."

"내일은 드레스나 고르러 가볼까요? 어떤 스타일이 좋아요? 역시 어깨가 드러나는 편이 좀 더 나으려나."

"네 맘대로 골라 뿅……."

"그냥 사진만 찍고 말긴 좀 아까울 것 같은데. 형도 침대까지 생각한 거죠? 입고 벗기 편하게 디자인 따로 맡기는 게 낫겠다. 어차피 크기 맞추려면 주문 제작 해야할 거고."

"한 번 입고 말 거에 돈지랄은 뿅…. 대충 있는 디자인 중에 써. 불편한 건 내가 참을 테니까."

"그럼 안 되죠. 나중에 형이 벗길 건데."

"……뭐?"

 

그제야 명헌의 팔이 떨어졌다. 자유로워진 시야 한가득, 우성이 웃고 있었다. 우성의 바로 위에서 조명이 빛났다. 눈이 부시다. 하얗게 부서지며 일렁이는 빛무리에 눈을 찌푸린 순간 우성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쵹. 장난이라도 치듯 이마에 짧게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알잖아요 형. 난 형한테 한 번도 이긴 적 없어요."

 

산왕 시절부터. 

 

패배를 입에 담는 에이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하얀 빛을 반사하는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난다. 익숙한 빛. 그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눈앞에서 항상……. 으음, 형? 무슨 말이라도 좀, 우왓! 우성의 몸이 뒤집혔다. 간단하게 에이스의 위로 올라탄 명헌이 손을 뻗어 연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정우성."

 

나도 마찬가지야.

 

마지막 말은 속삭임과도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혀가 얽혀드는 사이에도 눈이 부셔, 명헌은 하릴없이 눈을 감았다.

미소가 스민다. 마치 빛이 남긴 잔영처럼.

꽤 기분 좋은 패배였다.

🎧 오디오를 틀어주세요

Bride of Jun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