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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w. 빡미

@bbakmakemecrazy

"저기 니네 애기 온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하게 2학년 교실로 들어오는 1학년을 본 친구들이 먼저 말한다. 그러면 명헌은 무감한 얼굴로

 

"애기 왔냐, 베시."

하고 건방진 1학년을 맞이했다.

"형! 밥 먹으러 가요!"

 

오늘 잔반 없는 날이라 스파게티랑 돈가스 나온대요. 다섯 번 먹어야지. 형은요? 요즘 덜먹지 않아요? 체중 조절해요? 저번에 두 번밖에 안 먹던데. 종알종알 쉼 없이 떠들어대는 우성을 옆에 낀 명헌은 친구들 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학기 초부터 이어진 광경이었다.

 

체육 특별전형으로 산왕에 입학한 학생들은 개학 전부터 겨울 합숙에 참여해야 했다. 당시 명헌은 조금 신나 있었다. 후배가 들어오면 어떻게 이끌어 줘야 할지 작년의 선배들을 떠올리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작년의 자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돌이켜봤다.

 

 

 

 

 

들어오자마자 에이스가 될 재목이라며 감독과 주장이 명헌에게 당부한 후배는, 첫 대면에는 경계심이 있었고 긴장한 채였지만 그거야 처음 산왕에 입학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그 애는 명헌의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 없을 만큼 귀엽고 말도 잘 들었다. 자주 일대일을 요청하긴 하지만 실력 좋은 선수와의 대결은 명헌이 오히려 환영이었다. 덕분에 끝까지 둘만 체육관에 남아있는 일이 많았다. 하루 종일 함께하고 잠을 잘 때만 겨우 떨어졌다. 그것도 고작 몇 걸음의 옆방. 그 정도로 주야장천 붙어있으면 없던 정도 생길 지경이었다. 명헌이 아주 우성을 끼고 사니 농구부 친구 하나는 걔가 니 애냐고 물어봤다.

 

"우성이 애기는 맞지."

 

"형 저 애기예요?"

 

그냥 좀 애처럼 귀여운 면모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는데 어미를 붙이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우성이 명헌에게 물었다. 명헌은 대답하지도 못하고 우성을 보다가 웃었다. 순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애기냐고 묻는 우성이 진짜 애기같아서. 명헌이 웃는 걸 보고 우성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후로 부원들은 명헌이 우성 없이 있을 때면 너네 아기 어디 버리고 왔냐며 묻고 우성이 오면 니네 애기 왔다며 웃어댔다. 명헌에게 우성을 지칭할 때는 니네 애기, 우성에게 명헌을 지칭할 때는 니네 형. 장난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긴 호칭이었으나 당사자들도 만족하는 바람에 그 호칭이 쭉 이어졌다.

 

 

 

 

 

그래도 부 활동이 아닌 시간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명헌은 앞서 줄 선 정우성의 동그란 머리통을 보며 생각했다. 주전으로 발탁될 1학년이 우성밖에 없어서 잘 챙겨주려고 하긴 했다.

 

그래도 보통 이렇게까지 오나?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어색하게 2학년 교실을 기웃대던 우성은 금방 뻔뻔하게 제 자릴 찾아오듯 굴었다.

 

학기 초부터 이러면 친구들이랑 친해지기 어렵지 않나?

 

걱정까진 아니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금방 뒤돌아보며 웃는 우성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게 느껴졌다. 이렇게 붙임성이 좋으면  누구나 금방 친해지겠지. 이런 얼굴로 웃으면 더 그렇고. 명헌은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의아하지만 행복한 얼굴의 우성이 활짝 웃었다.

 

이런 애 친구 걱정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겠다.

 

 

맨날 농구하고 밥 먹고 농구하고 자고 일어나서 농구하고. 개학하고 나서는 오전 수업이 추가되었지만, 그 시간마저 우성은 비집고 들어왔다. 변함없는 일상인데도 즐거웠다. 아니 원래도 즐겁긴 했는데. 뭔 생각을 해 그냥 농구하는 거지. 근데 귀여운 후배 들어왔다고 더 재밌어졌다. 눈도 못 뜬 채 아침 구보를 뛰러 나가면서도 형 굿모닝. 잘 잤어요? 하면서 붙어오고 같이 씻고 아침도 같이 먹었다. 조식이 맛없으면 슬쩍 담을 넘고 나가 편의점을 터는 것도 가르쳐주었고 힘이 남아도는 날에는 빡세게 뛸 수 있는 뒷산으로 가 타임어택 대결을 하기도 했다.

 

전부 친구들이랑 했던 짓이다. 근데 얘랑 또 같이하는 게 새롭게 재밌었다. 이게 바로 후배를 데리고 키우는 맛? 잘 따르고 귀엽고 농구까지 잘하는 후배는 예쁠 수밖에 없긴 하지. 헉헉거리며 산 정상에 드러누워 있던 명헌은 고개를 돌려 옆의 후배를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혀를 빼내고 헥헥거리는게 웃겨서 소리 내서 웃었다.

 

"우성 진짜 빠르네 베시."

 

"제가 할 말인데. 근데 왜 웃어요?"

 

왜 웃냐며 묻는 목소리에도 웃음이 번져있었다. 단어 사이사이 숨이 찼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런 날이면 당연히 잠들기 전에 허기가 느껴졌다. 점호도 끝나고 고요한 방 안에 누워있기를 잠시. 방문 너머로 똑똑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명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는 척척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은 너구리 개삘이다 베시."

 

"오늘은?"

 

명헌이 문을 열면 의아한 얼굴의 우성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눈을 마주한 명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도 그렇고 맨날 너구리만 먹잖아요."

 

 소곤소곤 항의하는 목소리에 명헌은 차분히 앞장서 공용주방을 향할 뿐이었다.

 

"매일 다른데 우연히 그런 것뿐임 베시."

 

그러고는 신속 정확한 움직임으로 너구리 한 묶음을 끓여냈다. 완벽 베시.

 

"진짜 형이 끓여주는 게 제일 맛있어요. 나는 왜 이런 맛이 안 나지?"

 

다람쥐처럼 귀엽게도 볼을 부풀려 입안 가득 오물거리는 우성이 말했다.

 

"이게 바로 연륜의 차이 베시."

 

명헌은 덤덤하지만 뿌듯함을 담아 대답했다. 다른 누군가 먹는 거만 봐도 배부르단 말을 우성을 보며 이해했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두 젓가락당 한 봉지 비우기를 실천했다.

 

"형 근데 있잖아요."

 

국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던 명헌에게 우성이 의미심장하게 운을 띄었다. 부족했나?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명헌이 말하라는 듯 슬쩍 눈만 들었다.

 

"그, 아, 아까. 있잖아요. 낮에."

 

답지 않게 말을 질질 끄는 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데? 설거지 수준으로 그릇을 비운 명헌이 끄윽 소리를 낸다. 아 더러워!

 

"낮에 뭐 베시."

 

다 먹은 그릇을 냄비 안에 겹쳐놓는다. 우성은 입술을 우물대다가 아무런 대답 없이 냄비째로 들어 싱크대로 향했다. 명헌도 별생각 없이 냉동고에 있는 아이스바를 두 개 꺼내온다.

 

뽀득뽀득 깨끗하게도 설거지를 마친 우성이 손을 탈탈 털며 다시 식탁으로 와 앉았다. 명헌은 아이스바 하나를 까 자기 입에 넣고, 다른 하나도 까서 우성의 입에도 넣어주었다.

 

"고백받은 거예요?"

 

낼름낼름 햄스터처럼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던 우성이 대뜸 물었다. 명헌은 별 대답 없이 와삭와삭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었다. 우성과 점심 먹고 농구 한판 때리러 농구부 건물로 가던 명헌을 한 여학생이 붙잡았었다. 잠시 우성을 남겨두고 자리를 비웠었다.

 

"엉 베시."

 

명헌은 가볍게 대답했다.

 

"사귈 거예요?"

 

이어지는 물음에 입안 가득 아이스크림을 담은 명헌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농구만 하기도 바쁨 베시."

 

"흐하하. 근데 저도요."

 

우성은 한쪽 팔을 쭉 뻗어 식탁에 고개를 기댔다. 웃음기 가득한 시선이 명헌을 향했다. 형도 그럴 줄 알았어요. 다른 애들은 왜 안 사귀냐고 오히려 이상하게 보잖아요. 진짜 귀찮아. 입을 삐쭉대던 우성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근데 우리만 이러다 진짜 농구랑 결혼하면 어떡해요? 말은 그러면서도 그 미래가 싫지 않은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농구랑 결혼이라도 하면 다행 베시.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수가 있다 베시."

 

농구가 우리를 버리는 거지. 무시무시한 말에 우성이 으악 소리를 냈다. 노총각이라니. 단어부터 끔찍했다. 막대에 붙은 아이스크림까지 알차게 빨아 먹던 우성은 몸을 일으켰다. 명헌이 우성에게 쓰레기를 건네고 우성은 쓰레기들을 모아 버리고 온다.

 

"형. 우리 서른까지 아무도 없으면 결혼할래요?"

 

"흠…. 너무 내가 개손해 아니냐 베시."

 

명헌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제가 손해죠! 저는 잘생겼고! 키도 크고! 완전 멋진 프로 농구 선수일 텐데! 성격도 짱이고"

 

"그건 나도 같음 베시."

 

"에이 형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죠."

 

이 새끼 뭐죠? 당돌한 후배의 발언에 명헌이 미간에 힘을 준다. 그에 맞서 우성도 미간에 힘을 준다. 이상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로를 쳐다보던 둘은 푸하, 하며 같은 순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데요? 심심할 때 맨날 농구도 해줄 거고. 야식으로 라면도 맛있게 끓여주잖아요."

 

"그니까 내가 개손해 아니냐 베시. 근데 그럴 거면 농구 기계랑 결혼하는 게 낫지 않음 베시?"

 

"네 그거 형. 내 원온원 기계"

 

"하.”

 

무표정한 명헌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에헤헤.”

 

우성은 활짝 마주 웃었다.

 

 

 

 

 

 

 

 

 

 

그랬던 때도 있었는데.

너무 붙어 다녀서 우성이 혼자서 3학년을 어떻게 보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현실이 될 수 없었다. 우성은 명헌이 졸업하기도 전에 먼저 학교를 떠났다.

명헌은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훈련 전 혼자서 개인 운동을 할 때. 조식이 맛이 없을 때.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때. 식후땡 농구할 때. 농구할 때. 농구할 때. 농구할 때. 하루의 끝을 마치고도 아쉬울 때. 잠들기에 허기진 느낌이 들 때. 밤하늘을 바라볼 때. 더워져서 아이스크림이 땡길 때. 시원해진 가을바람에 외투를 걸칠 때. 한바탕 내린 눈이 쌓여 온통 새하얀 세상일 때. 그리고 다시 가벼운 봄바람이 살랑일 때.

우성이 꼭 쓰라고 당부하던 편지는 텀이 길긴 해도 꾸준히 이어졌다. 하루 종일 우성과 나눴던 실없는 대화들이 그대로 글로 옮겨졌다.

'형 졸업 축하해요.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엔 졸업식 맞겠죠? 아 나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근데 형 혹시….'

이제는 꽤 의젓해진 편지 내용에 어딘가 섭섭해지려고 하면 영락없이 귀여운 티를 냈다. 주저함이 보이는 글의 요지는 결국 두 번째 단추를 보내달라는 이야기였다. 편지를 보던 명헌은 이미 떼놓은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한 손에 굴리며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었다. 가슴께가 간지럽기도 하고 허해지는 기분이 반복되었다.

이윽고 명헌은 펜을 들었다.

PS. 근데 30은 너무 멀지 않냐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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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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