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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w. 뇌물수수

@kickback_love

"이명헌 너, 너무 정우성만 편애하는거 아니냐?"

"그건 현철 뿅. 암바 약하게 거는거 다알아용."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말 안들어용." 

말을 마친 명헌은 쉬는 시간이 끝났다며 총총 걸어갔다. 자판기 앞에 홀로 남은 현철은 묘한 표정으로 명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가만히 놔둔 것이 화근이었을까. 현철은 명헌의 귓가가 조금 붉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우성. 집중 뿅."

"네에엡!"

 

편애한다고? 내가?

그럴 리 없었다. 이명헌은 농구부의 모든 이들을 하나의 구조 단위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감히 사심이라고는 티끌 하나 조차 들어갈 수 없이 공고했다. 산왕 공고 농구부 창립 이래 최고의 미남, 즉 불세출의 미남이라고 해서, 어린 나이의 에이스라고 해서, 감히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명헌은 동요한다.

 

그럴 리 없다. 편애. 특별대우. 무너지는 신뢰와 붕괴되는 조직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자신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이. 

 

"명헌아!"

"형!"

"...!"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이쪽이었다. 패스의 의미로 날아온 농구공에 정통으로 가슴팍을 맞은 명헌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젠장, 뿅... 명헌은 팔로 눈매를 가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이게 뭐라고. 근데 아프다 뿅...

 

그렇게 이명헌은 기절했다. 아주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

 

"형, 명헌이 혀엉..."

"왜용."

"형 요즘 이상해요. 무슨 일 있어요?"

"뭐가 뿅."

"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정우성의 감각은 짐승의 것을 닮아 예민한 육감이었다. 이명헌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한 동요를 정우성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 하지만. 다행인가. 이명헌은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한다. 우성. 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용. 네에... 그렇게 정우성을 보내고 혼자 남은 이명헌은 생각한다. 편애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로 더 혹독하게 굴린 것은 아닌가. 필요 이상으로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갑게 형이라고 불러오며 꼬리를 흔드는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삐뇽..."

퉁, 퉁, 농구공을 튕긴다. 바닥에 닿았던 공이 튀어올라 손아귀에 착 감겨들었다.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근육이 펌핑되어 딱딱해진 허벅지가 불타오르듯 뜨겁고, 팔에는 감각이 없었다. 주변에서 그만하라며 말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명헌은 계속해서 달렸다. 달리고, 던지고, 또 달리고, 또 던지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정우성을 사랑하는가?

 

한번 마음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기 시작한 이를 쉬이 보낼 수 없었는지라, 단어를 비틀고 문장의 즙을 짜내었다. 흰 실이 붉은 물감을 만나면 붉게 되듯, 푸른 물감을 만나면 푸르게 되듯 그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은 없었다. 헌데 너는 구태여 그리 아름다운 탓으로 호기심을 일게 했다.

 

나는 결핍으로부터 도망친다. 멀리. 더 멀리. 영원으로부터 도망친다. 그것을 감당할 필요는 없었다. 우성은 미국으로 가고, 나는 학교를 졸업한다. 정해진 미래와 정제된 현실이 마음을 편안케 한다. 그래. 그정도면 되었다. 더 큰 마음은 감히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조금의, 혹은 약간의 편애라는 말은 이명헌의 사전에 없었다. 그것은 우성이 미국으로 갈 때까지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혀엉... 저 미국 가는데..."

"마중나왔잖아 뿅."

"뭐 더 없어요? 기다리겠다던가, 보고싶다던가, 등등등... 많이 있잖아요."

우성의 칭얼거림에 명헌은 그를 빤히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명헌이 늘 사용하는 어미 없이 되묻자 우성이 입을 다문다. 세상의 온갖 찬사로도 부족할 나의 에이스. 너를 위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내뱉는 한마디가 평생을 동반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잘다녀와, 뿅."

"네! 기다리고 있어요, 형!"

 

기묘하고 어색한 침묵은 의외로 싱겁게 끝난다. 결국 명헌의 항복이다. 이걸 항복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했다. 우성이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우성을 더 많이 사랑하는가? 모를 일이다. 명헌은 그렇게 미해결의 명제를 두고서 우성을 미국으로 보냈다.

 

"명헌이 형!"

"우성 뿅."

"보고싶었어요, 명헌이 형."

우성이 미국에 간 뒤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몇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고, 아주 이따금 너무 힘들어할 때면 국제 전화도 했다. 직접 만나는 일은 한번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연락이 끊기지 않은 채로 다시 마주했다. 우성은 그새 키가 컸는지 상하 좌우로 조금씩 더 커졌고, 미국의 태양 아래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한품에 끌어안는 너를 마주 끌어안으면, 마치 곰을 마주안은 듯 한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나의 에이스였다. 너만을 편애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는 얘기였다. 다른 이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그래서 네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이것은 나의 애정이며 배려였다. 물론 이것을 두고 편애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형, 저랑 결혼해주세요."

"삐뇽..."

그래서 우성이 무릎을 꿇고 프로포즈를 했을 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을 때, 솔직히 말하면 이명헌은 놀라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연애를 했던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누구보다 연인처럼 보였던 것일까? 우성은 자신을 좋아한다. 자신은 우성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결혼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당연한 전제가 아닌가? 명헌은 동요하지 않는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이명헌은 정우성을 편애한다. 치우치게 사랑한다. 사무치게 사랑한다. 그렇다면 정우성은?

 

"사랑해요, 형."

정우성은 언제나, 늘 그랬듯이, 한결같이, 이명헌을 사랑한다. 이명헌이 모르는 시간에서도, 알고 있는 시간에서도, 언제나.

 

"우성."

"네, 형."

"그 말 무르기 없기예용."

"... ... 네!!!"

감격한 우성은 울었다. 역시 잘 운다니깐용. 저보다 큰 덩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남들은 다 한번쯤 걸린다는 메리지블루도 두 사람은 스무스하게 지나갔다.

 

우울 뿅.

원온원 할까요?

삐뇽.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우울이 스며들 겨를이 없었다. 농구가, 원온원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대판 싸우고 파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다. 결혼까지의 고민 과정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정우성은 언제나 확신했다. 이명헌은 언제나 고민했다. 그러나 명헌의 고민은 우성의 확신으로 하여금 매듭지어졌다. 이 결혼, 괜찮은 것 같았다. 

 

"우성이 드레스를 입어용."

"엑, 전 형이 드레스 입은거 보고싶은데!"

"난 턱시도 뿅."

"싫어요. 그럼 둘 다 드레스 입으면 안돼요?"

"삐뇻..."

 

그런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으니, 결혼식 최대의 난관, '스드메'였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그중에 스튜디오는 돈을 쓰면 되니 상관이 없었다. 메이크업도 뭐, 요즘은 남자들도 다 받으니까. 그런데 드레스는 문제의 무게가 달랐다. 아무리 이명헌이 정우성을 편애한다지만, 여기서는 의견을 굽히기 힘들었다. 명헌은 처음으로 결혼식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이런거, 안하면 안되는걸까. 턱시도 두명이서 하는 결혼식은 아무래도 멋이 없다며, 우성은 우겼다. 한명이라도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그게 명헌이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우겨대는 통에 결국 임시 피팅이라도 해보기로 했다.

 

"으음... 사이즈가..."

"맞춤으로 가죠."

"굳이용..."

"제 평생의 로망이예요, 형."

평범하게 여성용 사이즈로 나온 웨딩 드레스가 운동하는 남자의 두툼한 흉통에 맞을 턱이 없었다. 맞춤으로 주문제작을 해서라도 입히겠다는 우성의 욕망만 아니었더라면 애진작에 끝났을 소모전이다. 그러나 평생의 로망이라며 눈을 반짝이는 정우성의 모습에 이명헌은 하는 수 없이 지고 말았다. 이래나 저래나 이명헌은 정우성을 편애했기 때문에. 자기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나 뭐라나. 

 

"형, 진짜 잘어울려요."

"뾰옹..."

다리가 길고 날렵한 우성은 슬림한 핏의 오프숄더 하트 네크라인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를, 몸통과 허벅지가 두터운 명헌은 체형이 커버되도록 어깨를 감싸는 풍성한 벨라인의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카락을 매번 빡빡 민 덕에 티아라며 웨딩 베일이 고정될 곳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결혼식 드레스 준비는 나름 순조로웠다. 결혼식 장소는 어느 호화로운 호텔이었다. 남는 것이 돈이라, 꽃장식을 잔뜩 추가한 덕에 하객석이 적음에도 그다지 휑해보이지 않았다. 결혼식 하객을 최소한으로 부른, 나름의 스몰 웨딩이었다. 

 

"이상해, 뿅."

"뭐가요?"

"너랑 결혼한다는게."

"싫어요?"

"아니, 뿅."

"그럼 됐어요."

"삐뇻..."

"그렇게 말해도 못물러요. 형은 나랑 결혼해야 해요. 진짜루."

"뾰옹..."

"설마 메리지 블루 그런건 아니죠?"

"아니다 뿅."

 

정우성은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메리지 블루냐고 걱정할지언정 명헌의 사랑에 대해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이명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명헌은, 이명헌 또한 불안해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우성을 편애하고, 또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는 기분이 드는 건, 뭐랄까, 과거의 기억을 때문일 것이다.

저 밤톨같은 머리를 편애하지 않겠다고 되뇌이던 밤.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인지할 시간이 필요했으나, 우성은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서 제게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어느 한 순간도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밤들도, 이제 그만 인정하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낮들도, 모두 너를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신랑 이명헌은 신랑 정우성을."

그렇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이명헌은 그제야 자신이 가진 감정의 크기를 인지한다. 제가 가진 사랑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지. 또 제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을."

그러므로 나는.

 

"맹세합니까?"

맹세한다. 

 

영영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더없이 반짝이는 너를. 내 평생의 반려를. 영원토록 사랑하겠노라고. 

 

"신랑 정우성은 신랑 이명헌을"

형이 몰라주던 시간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을."

형이 알아봐준 시간도,

 

"맹세합니까?"

전부 내 것이예요.

 

"예!"

평생, 영원토록. 내 사랑은 질리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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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e of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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